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되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계승자라 자처하던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며 자신의 강경 통치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유럽 사회에 변화의 기운이 감도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했던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을 '유럽의 헌병'으로 칭했다. 엥겔스는 니콜라이 1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야는 끝까지 일개 군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잔인함을 의지의 표현이라 착각했으며 독단적인 집정을 힘의 상징이라 믿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제2공화정이 수립됐다. 니콜라이 1세는 마침 궁정 무도회에 참가했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스스로 유럽의 헌병이라 여겼던 니콜라이 1세는 그 자리에 있던 군관들에게 즉시 소리쳤다. "모두 어서 말을 준비하시오! 프랑스가 공화정을 선언했소!"
1849년, 니콜라이 1세는 헝가리에 군대를 파견해 혁명을 진압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애국 시인 페퇴피가 쓴 시 한 편은 당시의 정서를 잘 반영한다." 생명은 고귀하고 사랑은 그보다 훨씬 고귀하다. 하지만 자유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 둘을 포기하겠다!" 이 시는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1853년, 니콜라이 1세가 또다시 투르크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던 프랑스와 영국은 러시아에 극도의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한 태도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말했다. "1854년의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승리했던 1812년 때만큼 강대해질 수 있소." 하지만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에 영광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조국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고 말았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러시아 연해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이 곧 그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것이 러시아의 흑해 진출을 막기 위해 서구 열강들이 동맹을 맺고 벌인 '크림 전쟁'이다.
크림전쟁 발발하다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진행된 전쟁으로 흑해를 둘러싸고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사르데냐 연합군과 러시아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에 패한 후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한다.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이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 동안 전장의 다른 쪽에서는 한 포병이 펜을 들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전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레프 톨스토이였다. 그는 러시아 병사들의 용맹함과 귀족 장교들의 부패, 러시아의 쇠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장거리포를 사용했던 유럽에 비해 러시아는 사격 거리가 겨우 300보밖에 되지 않는 100년 전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쟁이 시작되기 전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지도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연합군은 철로로 물자를 운송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마차를 이용하고 있었다.
유럽의 산업혁명, 벌어지는 격차
1853년, 러시아의 철도는 모두 합쳐 1,000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의 5분의 1, 독일의 6분의 1, 영국의 15분의 1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흑해로 통하는 철도는 없었다. 이는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러시아의 재정 대신과 철도국 국장은 철로 증설에 대해 "쓸데없는 자본 낭비이자 국민 도덕을 해치는 일"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800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철 생산은 영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1850년이 되자 영국의 생산량은 1억 4,000만 푸드(러시아의 생산 단위로, 1 푸드는 16.38kg)인 데 비해 러시아의 철 생산량은 고작 1,300만 푸드에서 1,600만 푸드에 불과했다. 50년 만에 무려 10배 넘게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또한 당시 러시아의 기계류도 대부분 수입한 것이었다. 1856년에서 1860년까지 4년 동안의 수입액은 1824년부터 1828년까지 수입액의 72배에 달했다. 이처럼 농산물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는 경제 구조를 가진 러시아는 서유럽의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농노제로 인해 러시아의 생산기술은 점차 낙후되어 갔고 국력 역시 약해졌다. 이는 모두 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엥겔스는 크림 전쟁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원시적인 생산 방식의 민족과 현대적인 기술을 가진 민족 간에 벌어진 절망적인 전투였다." 크림 전쟁은 증기선이 범선보다, 기차가 마차보다 뛰어남을 증명해 주는 전쟁이었다. 19세기는 이미 철과 기계의 시대였다. 무엇보다 이 전쟁은 농노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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