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여왕의 종교
이사벨 여왕은 가톨릭 수호자로 스페인 통일을 촉진했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이베리아반도에서 아라비아인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통일 후에도 그녀가 해결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우선, 그녀는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일련의 법률을 제정했으며,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국가 기관을 설립했다. 이사벨 여왕이 세운 통일 국가의 영토는 무어인이 점유하고 있던 스페인 남부 카스티야, 칸타브리아, 아스투리아스와 북부 바스크 지역까지 포함되었다.
이사벨 여왕은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로 종교 부분에서만큼은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데, 일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아랍인과 유대인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모두 쫓아내 버릴 정도였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것도 종교적 이유가 컸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 탄압은 이사벨 여왕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 추방은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유독 그 악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유는 유대인 추방과 관련해 설립한 종교 재판소가 원주민 노예 문제까지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와 신대륙 발견
15세기 유럽의 항해 기술은 큰 발전을 이루었고, 많은 사람에게 강렬한 개척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콜럼버스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적 지원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수준의 꿈이었다. 그래서 그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국왕을 찾아가 적극적으로 항해 지원을 요청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한 일을 콜럼버스가 해냈다.
콜럼버스는 원래 인도 동쪽에 도착하려 했으나 뜻밖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진 못했다. 물론, 그 대륙의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은 신대륙은 아니었다.
훌륭한 항해사, 콜럼버스
콜럼버스는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을 밟았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콜럼버스는 그 지구 구체설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무역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대서양 횡단에 도전했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했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횡단해 인도에 이르는 항로 개척 사업의 후원을 받기 위해 오랫동안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를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포르투갈의 항해 정책은 희망봉을 지나 아프리카를 경유해 아시아에 도착하는 신항로 개척에 치중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콜럼버스는 스페인 부부 왕에게 눈길을 돌렸다. 콜럼버스는 그전에도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라나다를 수복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부부 왕은 콜럼버스를 후원할 여유 따윈 없었다. 얼마 뒤 스페인이 그라나다 수복에 성공한 후에야 비로소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할 수 있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에 이미 아메리카 땅을 밟은 유럽인은 있었다. 예를 들면, 바이킹 항해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들은 목표를 가지고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곳까지 표류해 간 것뿐이었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콜럼버스는 분명 훌륭한 항해사였다. 그는 해상에서 풍향을 이용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의 범선으로 스페인에서 아메리카까지 항해하는 일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도전이었다.
스페인 통일과 종교 재판소
스페인의 통일은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결혼으로 완성되었다. 이들의 결혼은 이베리아 반도의 강대국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결합으로,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수복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통일 국가는 매우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그라나다를 함락하는 데는 10년이나 걸렸다. 10년 후, 가톨릭 부부 왕의 연합국은 이베리아반도의 종교 통일을 완성했고, 더욱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종교 재판소를 설치했다.
종교 재판소 설립 초기의 목적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 기구는 1478년 처음 설립되었는데, 나중에는 가톨릭 신앙이 깊지 않은 유대인을 모두 강제로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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