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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내부로는 이슬람, 외부로는 필리핀을 점령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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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사건' 이슬람 무어인, 반란을 일으키다.

 1492년 그라나다가 수복된 후 가톨릭에 귀의한 이슬람교도들을 모리스 코스라고 불렀다. 특히 발렌시아가 지역에 거주하는 모리스 코스들은 전체 인구의 3분의 2에 달했고 발렌시아의 영토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라나다에서는 지금도 곳곳에 이슬람 문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지배 세력인 가톨릭교도들은 이미 개종한 이슬람교도들에게도 매우 잔혹하게 굴었다. 마음대로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권력을 이용해 부녀자들을 희롱했다. 천주교 신부들까지도 이러한 악행을 일삼았는데, 한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그 지역 교구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주민들은 진상 조사위원들에게 "그놈을 이 지역에서 쫓아내 버려요! 그렇게 못하겠다면 그가 희롱한 여자들을 모두 아내로 맞아야 합니다. 우리 마을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의 눈이 하나같이 그놈을 닮아 파란 눈이란 말이오."라고 말했다.

 그라나다가 수복된 후 알함브라 궁전은 가톨릭 성전으로 새롭게 단장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가톨릭과 이슬람 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식민주의는 지난 몇 세기 동안 계속된 국토 회복에 대한 원한이 쌓이고 쌓여 드디어 이곳에서 잔혹한 피의 전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1568년 크리스마스이브, 무어인들은 알부하라스에 몰래 잠입했다. 그리고 이들의 폭력과 격한 감정이 한데 섞여 드디어 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정확한 목적이나 조직을 갖춘 전쟁이 아니었으나, 곧 거친 들판을 지나 궁핍한 시골 지방까지 퍼져나갔다. 펠리페 2세는 가톨릭교도들에게 마음대로 무어인 지역을 약탈하도록 허락했고, 이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가톨릭교도들은 그라나다에서 단번에 무어인들을 덮쳐 손쉽게 약탈을 끝내려 했다. 그러나 당시 펠리페 2세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일어난 무어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오스만 튀르크가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였다. 펠리페 2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1569년 1월 20일, 펠리페 2세는 나폴리 총독 알카라 공작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그라나다 사건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라. 그래야 오스만 튀르크 함대가 출항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라나다 반란 소식은 이미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리스 코스들은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전통을 조금씩 되살리기 시작했고 이슬람 사원을 재건해 다시 그들의 문명을 꽃피우려 했다.

 1569년 4월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 돈 후안이 이끄는 군대가 그라나다의 무어인을 공격했다. 그리고 1570년 10월 28일 모든 모리스 코스 추방령을 공표했다. 스페인 군대에 포위된 모리스 코스들은 죄수처럼 족쇄와 수갑을 차고 긴 행렬을 이루며 카스티야로 유배되었다. 그라나다는 도시 전체가 텅 비었다.

 이것은 스페인 가톨릭이 내부 이교도에 대해 저지른 최초의 식민주의적 박해였다. 그러나 차마 고향을 떠나지 못한 많은 모리스 코스가 다시 그라나다로 되돌아왔다. 이에 스페인의 추방령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1584년과 1610년에도 대대적인 추방령이 있었다. 그리고 회를 거듭할수록 스페인 가톨릭교도의 박해는 점점 심해졌다. 이교도에 대한 참혹한 박해는 스페인인들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고 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은밀히 모리스 코스들의 비극적 운명과 불행에 탄식하고 동정했다.


스페인, 필리핀을 점령하다

 한편 1542년 스페인은 동방에서 포르투갈과 향료제도 무역권 경쟁을 위해 서태평양을 향해 원정대를 파견했다. 모두 5척의 군함이 멕시코에서 출발해 탐사를 구실 삼아 향료제도로 향했다. 이때 이 원정단의 지휘관 빌라로부스는 필리핀 군도를 발견한 후 당시 황태자였던 펠리페 2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인다. 당시 포르투갈은 스페인이 사라고사 조약을 위반했다고 강력하게 항의하긴 했지만 스페인은 끝까지 필리핀 제도 소유권을 주장했다.

 1564년 펠리페 2세는 어떻게든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던 향료 무역권을 나눠 갖기 위해 중국, 일본에 진출했다. 같은 해 미구엘 로페스 드 레가스피가 함대를 이끌고 멕시코에서 출발해 필리핀 정복에 나섰다. 1565년 레가스피는 세부섬에 상륙해 필리핀 최초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4년 후 스페인은 다시 파나이에 두 번째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펠리페 2세는 레가스피를 필리핀 총독으로 임명하고 현지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것을 명령했다.

 1570년 레가스피는 필리핀 총독의 이름으로 민도로섬에 군함 15척을 파견했다. 또한 손자 후안 살세도와 고이티를 파견해 루손섬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통치하게 했다. 고이티는 마닐라 술탄 술리만과 동맹을 맺은 후 다시 마닐라를 점령했다. 1571년 5월 레가스피는 마닐라를 필리핀 수도로 정하고 가톨릭교회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아 필리핀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었다.

필리핀에 위치한 어느 해변
필리핀의 한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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