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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13_에드워드 1세와 스코틀랜드, 영국 의회의 발전 과정

by 티제이닷컴 2024.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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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1세와 스코틀랜드

 1296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인 후 스코틀랜드의 보물인 대관식용 스콘석을 빼앗아 왔다. '리아 파르'라고 불리는 이 성스러운 돌은 1998년에 이르러서야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로 반환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에 복속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원한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뿌리가 깊다. 이는 1995년에 나온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에드워드 1세는 부왕인 헨리 3세가 겪었던 수모를 보면서 귀족들이야말로 왕권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라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시몽이 왕권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의회를 오히려 귀족 세력을 제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귀족이 장악하던 의회에 시민 대표 자리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에드워드 1세가 재위하는 동안 시민계층의 의회 참여는 점점 확대되고 귀족들의 권력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영국 의회

 1295년에 에드워드 1세는 제1차 국회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전국 각지의 평민 대표들도 참여함으로써 귀족, 성직자, 기사, 시민의 네 계층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영국 의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모범의회'였다.

 때로는 계획했던 것보다 더 크게 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모범의회 이후부터 기사와 시민 대표가 의회에 참가하는 일이 정례화되었고, 임시적인 성격을 띠던 의회가 상설 기관으로 발전했다. 이는 국왕에 대한 제약 또한 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의회의 권한은 날로 커졌고, 세금 징수의 비준권과 입법권, 심지어는 국왕을 파면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갖게 되었다.

 영국의 헌정 제도의 기초가 된 의회는 회의를 거듭하면서 대화하고 타협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음모와 계략, 전쟁과 살육은 끊이지 않았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정치적인 문명도 점차 발전해 가고 있었다. 이로써 영국 의회는 '의회의 어머니'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들의 정치적인 도전이 후대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치문화를 가꾸는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대의제 정부와 같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인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영국 의회는 '대의'의 효능을 실험하고 있었다.

 당시의 유럽 대륙은 여전히 암흑의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었으며,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역시 문명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시아는 절대적인 전제왕권 통치 아래에 있었다. 이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권리나 민주, 법제 등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영국에서는 민주주의의 개념이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듯 강대하고 선진적인 문명이 영국 국토 안에 잉태되고 있었고, 영국은 가장 먼저 중세를 벗어나 근대 문명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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