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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13_프로이센, 메이지유신의 롤모델이 되다.

by 티제이닷컴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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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 각국의 교육 보급 실태도 사절단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일본인이 서양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배움의 차이만큼은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교육 제도

 미국의 교육 보급률은 일본을 비교 불가하게 앞서 있었다. 일본은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인재 육성은 불가피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학교 설립이 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사절단은 동서양 전통 사상의 차이로 인해 교육의 내용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 지식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유형의 학문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발원한 유학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못한 무형의 학문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차이가 동서양의 빈부 격차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일본은 과거 2,000년 동안 꿈속에서 산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탄했다.

비스마르크의 일침 : 일본 메이지유신의 발전모델

 1873년 3월 15일, 프로이센에서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 독일 총리가 사절단을 접견했다. 비스마르크는 그 자리에서 "오늘날 세계 각국이 서로 예의를 갖추어 왕래하고 있으나, 이것은 표면적인 모습일 뿐 국제 관계는 철저히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서구 열강이 주장하는 공법이란 열강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준칙일 뿐이며, 자국의 이익에 불리하다면 그들은 거리낌 없이 무력을 동원할 것이다. "라고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일침을 가했다. 또한 "약소국이 자주적으로 독립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하며 내무와 외교 중에서는 내무를 우선으로 돌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일본 사절단은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식견에 감탄했다. 그리고 조약 개정의 실패로 좌절의 연속이던 그들의 여정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독일 군사 제도까지 견학한 사절단은 독일이 군사 교육을 대단히 중시하는 모습에 다시금 놀라며 "남학생들이 무기를 들고 군사 훈련을 받고 나서 1년 동안 상비군으로 복역해야 한다. 전 국민이 군사 훈련을 받는다."라고 기록했다. 그들은 또 크루프(Krupp)사를 둘러보며, 독일 군수 공업의 발전 수준을 확인하고, 독일의 군사 분야에서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런데 사절단이 외국의 문물과 제도를 배우기 위해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고 있을 때, 일본 국내에서는 정변의 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결국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는 내무를 돌보기 위해 서둘러 먼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어떻게 바라 보았을까?

 막부 통치자와 민중들의 태도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막부 통치자들은 외국 상황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한 예로 가나가와 조약 체결 당시에도,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발발했단 소식은 이미 일본에 전해졌다. 그리고 일본 당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가나가와 조약 이후에 체결된 안세이 조약은 일본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는 일본이 세계 정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국제 교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막부 통치자들의 정책을 살펴보면 개항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었다. 당시 일본은 자국의 힘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으며, 국제 사회에 편입되어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영사 재판권과 관세 등에 관한 자주권을 잃은 상태였기에 이러한 인식을 가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에 반해, 일반 대중 가운데에는 개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당시 사회적으로 대두된 '양이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양이론은 민족주의와 봉건주의 색채가 강했고, 세계 질서의 흐름을 알 리 만무했던 일본 대중들에겐 양이론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은 100명 이상으로 비교적 규모가 컸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등 메이지 초기 주요 정치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사절단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막대한 비용 지출을 일으켰다. 서구 열강들의 상황, 광업, 산업 등을 자세히 묘사하여 학술 저서에 버금가는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에는 일본이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야만 서구 국가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예측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를 작성한 것은 바로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당연히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미사절단의 요코하마를 떠나는 모습
요코하마항에서 출항하고 있는 이와쿠라 사절단

불평등 조약 수정

 미국 총영사 해리스가 일본에 대해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미국과 일본의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이 점은 관세 조항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메이지 정부는 성립 직후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몰락하고 막부와 일부 다이묘들의 재산을 승계해 메이지 정부의 재정적 기초는 마련하였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할 리 없었다. 게다가 당시엔 영업세도 없었고, 상인이 적고 상업도 발달하지 않아서 정부 예산의 상당 부분을 농업세로 충당해야만 했다.

 또한 산업을 발전시키고 식산흥업 정책을 실시하려고도 했지만 자금이 없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 인사들이 모두 무사 출신으로 융통성이 없고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부터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타락한 행위라는 인식이 있었다. 오쿠마 시게노부처럼 빌린 돈을 자본으로 하여 돈을 번 후에 상환한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관세였다.

 이후 일본과 외국의 관세 협상은 오랜 시간을 끌긴 했으나, 결국 조약이 평등하게 수정되기는 했다. 그 과정은 전혀 순탄치 않았는데 가장 문젯거리가 되는 국가가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과의 협상만 성공하면 다른 나라와의 협상은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영국과는 191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약 수정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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