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부에 '군비 의견서'를 제출하고, 유럽의 군제를 본떠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1872년 말부터 1873년 초까지 사절단이 유럽을 시찰하고 있던 시기에 천황은 '징병조서'를 선포하고, 태정대신이 '징병고유'와 '징병령'을 발표했다. 또 1872년에는 육군과 해군을 두는 국제적인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구시대적인 분위기가 짙은 병부를 폐지하고 군대를 관리하는 육군성과 해군성을 설립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육군성 대보로, 막부에서 군대 총감을 역임한 가쓰 가이슈를 해군성 대보로 임명했다.
징병제는 육군을 복무 기간 3년의 상비군과 2년의 후비군, 국민군으로 분류해 입대자가 3년간 현역으로 복무한 뒤 제1 후비군과 제2 후비군으로 각각 2년씩 총 7년간 복무하도록 했으며, 병과를 포병과 기병, 보병, 공병, 치중병 5개로 분류했다. 또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병학료와 조병사, 무고사와 같은 육해군 교육 및 군수 제조 기관의 설립을 건의했다.
징병제는 일본에 근대화된 상비군을 창설한 매우 중대한 개혁으로, 무사 계급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문제였다. 무사 계급은 본래 일본에서 쌍검을 휴대하고 다니며 언제든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징병제는 국가가 농민, 노동자, 상인 등 따질 것 없이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전임자가 무사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는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은 채 조서를 발표해야만 했다.
그는 태정관을 통해 '징병고유'를 선포하고, "무사들이 쌍검을 휴대하고 다니며 사람을 죽여도 관리가 그 죄를 물을 수 없었던 지난 봉건적 군제를 폐지한다. 징병은 모든 계급이 대상이다. 무사든 평민이든 모두 황국의 아들이므로 모두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서양의 병역 개념을 도입한 병역법을 실시했으며, 복역은 국가에 바치는 '혈세'임을 강조했다. 누구든 만 20살이 되면 군적에 편입시켰다. 1873년 초, 전국적으로 6개 진대를 설치하고 징병을 시작했다.
1873년 4월, 일본은 돜에 이어 전국으로 징병 범위를 확대하고 규정에 따라 상시에는 현역병을 3만 1,680명으로 유지하고, 전시에는 4만 6,350명까지 증강했다. 근위군도 당초 3,880명에서 점차 1만 명까지 늘렸다. 이로써 일본 전체 인구의 1,000분의 1이 군대로 편입되었다.
초기 징병제의 문제점
하지만 위에서 일방적으로 선포한 징병제를 국민들이 군말 없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징병제가 실시되자 1873년, 선포된 그해에만 전국적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 17차례나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유럽과 미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오쿠보 도시미치는 도처에서 세금 징수와 징병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는 걸 보고 농민들이 국가에 납부하는 '혈세'의 개념으로 징병을 실시하는 데 반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농민들이 징병령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호주와 장남, 외아들, 양자 등에게는 복역을 면제해 주면서 차남과 삼남을 징병 대상으로 삼으면서, 호적이 징병을 위한 인명부가 된다는 사실에 있었다.
게다가 270냥만 내면 복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에 돈 있는 사람들은 징병의 예외가 되었다. 이에 따라 1875년에는 복역을 면제받은 수가 장정 30만 명 중의 25만 명이 넘었으며, 면제받지 못한 대다수가 농민이었다. 결국 농민들은 장정의 노동력을 잃게 되므로 징병제는 조세가 가중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현실과 타협을 해야 했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몇 차례 징병령을 개정했다. 독일에서 비스마르크의 군대 통치 경험과 독일 군국주의의 효과를 직접 확인하고 돌아와서는 이를 참고하여 일본 국내 상황에 맞는 군제로 개혁한 것이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따라 독일 군제를 시찰했던 야마다 아키요시도 건의서를 제출했다. "강병은 비단 군사력을 기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일반 민중들의 지식 강화 역시 중요하다. 그러므로 구미 각국에서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처럼 각종 군사 학교를 설립해 군관과 병사를 양성하는 한편, 일반 민중들에게 군사 지식을 보급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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