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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3_일본 전국시대 요약 및 대항해시대와 일본

by 티제이닷컴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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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전국시대 요약


 막번 체제에서 나라의 대사는 언제나 막부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조정과 다이묘는 발언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천황의 세력은 12세기 말부터 약화되기 시작해,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나가와현 동남쪽 가마쿠라에 가마쿠라 막부를 건립했을 때는 이미 천황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졌고, 고대 국가의 율령 체제도 와해하여 무가 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2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시대가 바로 무가 정치 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막부의 군사 독재가 합법화됐고, 무사들의 권력은 한없이 팽창했지만, 천황과 조정의 구게(조정에 속한 문사 귀족) 권력은 점점 약해졌다. 

 제3대 막부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겐무중흥(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국왕 정치를 실현시킨 정변)이 일어난 후, 남북조와 전국시대로 이어졌다. 1333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렸다. 1334년,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에서 친정을 실시하고, 연호를 겐무로 바꾸면서 드디어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겐무중흥'이다. 하지만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서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무로마치 막부라는 두 번째 무사 정권인 북조를 탄생시키자,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피신해 도읍을 세우고 남조를 건립했다. 그러나 결국 1392년 북조가 남조를 통일했다.

 겐무중흥이 실패로 끝이 나자 천황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졌다. 전국시대(1467~1568)에 이르러서는 천황의 재산을 몰수해 각 다이묘가 나누어 가질 정도였다. 이 시기, 천황은 정치적인 권력은 완전히 상실한 채, 그저 정신문화 차원에서 상징적인 권위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천황이 있던 교토는 문화의 상징이 되고, 전국시대에 할거하던 군웅들은 모두 천황을 등에 업고 제후로 군림하며 자신의 패업을 달성할 기회만을 노렸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를 거쳐 일본이 통일된 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건립했다. 무가 정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에도에 막부를 세우고, 조정의 관리들을 통제하기 위해 '공가제법도'와 '금중병공가제법도'를 반포했다. 천황과 조정의 문인 공가는 예능과 학문에만 열중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개입을 차단한 것이다.

 에도와 오사카가 새로운 정치 및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천황이 있던 교토는 정치권력 밖으로 밀려나서는 한가로이 음풍농월이나 하는 문화의 도시가 되었다.

동서전쟁의 세키가하라 전투 그림
세키가하라 전투 장면. 출처 : 나무위키


에도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번 체제에는 '산킨코다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각 번의 다이묘가 2년에 한 번씩 에도로 와서 쇼군을 알현하고 다이묘의 처를 에도에 인질로 남겨두도록 하는 제도로, 막부의 다이묘들의 권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찬탈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일어났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세 등급의 다이묘가 정해졌다. 도쿠가와가 친족과 자제들은 친번 다이묘,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가 신하였던 후다이 다이묘, 전투 이후 도쿠가와를 따르게 된 도자마 다이묘, 이 세 등급의 다이묘는 각각 다른 대우를 받았다.


대항해시대 속 일본


 도쿠가와가가 막부를 세우고 통치하던 시기, 일본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에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1510년 지리상의 대발견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재빠르게 인도의 고아 지역을 점령했고, 뒤이어 1511년 말라카, 1557년 마카오를 차례로 손에 넣었다. 스페인은 1512년 마젤란을 보내 태평양을 건너 말라카 제도에 도착한 후, 1549년에는 필리핀을 점령했다.

 일본에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서양인은 포르투갈인이었다. 1543년 일본에 표류해온 중국 범선에 포르투갈인 3명이 화포와 카드를 가지고 일본 다네가시마에 상륙했다. 그들의 뒤를 이어 유명한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했다. 이때부터 일본에도 기독교가 전파되어 일부 다이묘들도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후에 영국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본 전국시대에 이미 서양에서 들여온 화병기가 활약을 하고 있었다.

 1637년, 규슈 서부 아마쿠사와 시마바라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를 일으킨 농민 중 대다수가 천주교도임이 밝혀졌고, 막부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본래 대외 개방 정책을 펼쳐 무역을 장려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정책이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도자마 다이묘들에게는 적합할지 몰라도, 강한 번을 억제하려는 막부의 정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막부는 큰 선박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고, 무역을 제한하기 시작했으며, 농민 봉기가 발생한 이후 외래 종교인 기독교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기독교를 금지하고 대외 무역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1633년부터 1639년까지 다섯 차례의 쇄국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쇄국령의 주된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일본인의 출국을 금지한다. 
두 번째, 기독교를 금지한다. 
세 번째, 중국과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선박은 나가사키에서만 무역을 허락하며, 다른 외국 선박, 특히 천주교를 믿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왕래를 금지한다.

 일본이 쇄국령을 선포했을 때, 서유럽에서는 유럽의 질서를 뒤흔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쇄국령이 일본과 서양의 교류를 차단하는 동시에 서양 세력의 영향에서 일본이 자유로워졌다는 장점도 있었다. 유럽도 30년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기에 일본의 쇄국 정책은 자리를 잘 잡게 되어 무려 220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일본은 태평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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