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리의 난 이후 분열되는 프랑스
자크리의 난보다 더 큰 문제는 국왕이 귀족들의 포로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는 귀족들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한때 타격을 받았던 귀족들의 세력은 다시 살아났고, 서로 힘을 합침으로써 그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이로써 천신만고 끝에 하나가 되었던 프랑스는 다시 사분오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큰 위기에 봉착한 샤를 5세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세수를 정리하고 포병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군사지도자 게클랭을 프랑스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영국을 공격했다. 이때 흑세자 에드워드는 병세가 심각하여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반면, 게클랭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70년대에 영국이 프랑스에 몇 곳의 항구를 건설한 것에 자극받아 프랑스는 국가 부흥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귀족들 간에 다시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샤를 5세의 아들 샤를 6세(1368~1442)는 1392년부터 정신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분열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당시 힘이 막강했던 오를레앙 파와 부르고뉴 파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세력 다툼으로 인해 프랑스 근처에서 기회만 엿보고 있는 적국 영국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흑사병
궁정 역사가 프루아사르는 이렇게 적고 있다. "흑사병이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사망선고와 다름없다." 1348년, 유럽에는 흑사병이 유행하여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했다. 한때 흑사병은 몽골인이 병에 걸린 시체를 크림반도로 들여옴으로써 전파됐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좀 더 유력한 설은 1347년 보석과 비단, 향료를 가득 실은 이탈리아 상인의 배가 흑해를 통해 제노바항에 들어왔을 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제노바 시민들은 선원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모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었다. 놀란 시민들은 그 배를 바다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배에 있던 쥐들이 육지로 올라와 병원균을 퍼트리고 말았다. 그래서 얼마 후 그 지역 사람들도 흑사병에 걸려, 3개월 후에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번졌으며, 이후 제노바 지역 상인에 의해서 서유럽으로 전파됐다. 그 당시 사망자 중에는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가장 많을 정도였다.
흑사병은 사망률이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한 왕실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흑사병은 미친 듯이 빠르게 전파되고, 잔혹하며, 또 두렵고 야비한 질병이다. 하나님만이 그것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흑사병은 역사상 유례없는 폐해를 가져왔다. 가정이 붕괴하고 인구가 감소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작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흑사병을 제재로 한 걸작으로, 이 책에서 그는 플로랑스 지역에서 발생한 흑사병의 심각성을 묘사했다. 또 흑사병에 걸린 사람이 어떻게 길이나 집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지에 대해 서술했다. 시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를 맡고서야 이웃들은 비로소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했다. 여행자들이 목격한 것은 사람의 흔적조차 없는 들판, 손님도 없이 문만 덩그러니 열려 있는 술집, 그리고 주인을 잃은 가축들뿐이었다. 가족과 친척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버리기도 했다.
1320년대에 2,000만 명가량이었던 프랑스 인구는 흑사병으로 1,000만 ~ 1,200만 명으로 줄었다. 흑사병은 유럽과 세계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모든 이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가져왔고, 요행으로 살아남은 귀족들은 대토지를 황무지처럼 버려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력이 부족하여 임금이 상승하고, 수입이 증가한 농민들은 방치된 땅을 사들여 토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농노계층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흑세자 에드워드
흑세자 에드워드(1330~1376)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동안 잉글랜드의 수장이었다. 그는 에드워드 3세와 헤노가의 필리파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로서 옥스퍼드셔주 우드스톡에서 출생했다. 에드워드 3세는 그를 체스터의 백작, 콘월의 공작, 웨일스의 친왕으로 임명했다. 이는 모두 왕세자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였다.
'흑세자'라는 별명은 그의 갑옷 색깔이 검은색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별명은 16세기 문헌에 처음 등장하며, 에드워드 생전에는 이렇게 불리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크레시 전투(1346), 칼레 전투(1349)에서 영국의 승리를 끌어냈고, 1355년에는 아키텐을 차지했다. 그리고 1356년에는 그의 명성을 가장 드높인 푸아티에 전투를 치렀다. 그는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함께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무장한 기사가 접근전을 치르는 전투방식은 50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이때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영국의 장궁병들은 접근전의 기회를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에, 용맹한 프랑스 기사들도 그들 앞에서는 살아있는 과녁이나 다름없었다.
1356년에 흑세자 에드워드는 아키텐의 공작으로 봉해지고, 1362년에는 아키텐과 가스코뉴 지방을 부왕으로부터 하사받아 8년 동안 통치했다. 그러나 그가 통치자로 있는 동안에 그의 군대는 불법 행위를 일삼아 그의 명성에 흠집을 냈다. 또한 카스티야 폐왕 페드로를 도와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 그곳 귀족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에드워드는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그 뒤 병세가 악화하였다. 결국 그는 1371년 1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1372년 말, 아키텐 공작의 칭호를 상실했다. 이후 그는 사냥과 칼싸움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 1376년 웨스트민스터에서 임종, 캔터베리에 묻혔다. 그의 아들 리처드 2세(1367~1400)가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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