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일본61 [일본 근현대사]#39_청일전쟁 발발. 일본, 조선을 탐내다 구미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기 위해 제1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가 무쓰 무네미쓰의 계책을 받아들여 도쿄에 로쿠메이칸(메이지 시대 외국인 접대소)을 건립하고 서양 인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어 일본 서구화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1883년 준공된 로쿠메이칸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당시 일본의 주요 정치인과 외국 사절들이 연회를 열고 친분을 다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 와중에 이토 히로부미는 주색을 일삼으며 음탕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시기를 일본인들은 '로쿠메이칸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약 수정을 위한 비밀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협상에 실패하자, 오쿠마 시게노부가 그 뒤를 이어 협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협상이 거의 타결되려는 때에 영국의 '타임.. 2024. 1. 12. [일본 근현대사]#38_조선, 중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 1879년 3월, 일본은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이름 바꾸고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6월에는 류큐 국왕 쇼타이와 왕실 구성원들을 도쿄로 압송해 류큐 왕국을 정식으로 합병했다. 이제 다음 목표는 조선이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욕 이후 일본은 북상과 남진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래서 북으로는 조선을 손에 넣고, 만주와 몽골을 침략한 후엔 중국 전역으로까지 손을 뻗친다. 남으로는 타이완을 점령한 후 동남아에 진출한다. 이 둘 중에서 일본은 북상에 더욱 주력해 훗날 대륙 정책까지 수립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전략은 이미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차근차근 실시된 것이었다. 1876년, 일본은 조선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목적은 조선 침략뿐만 아니라, 조선이 중국의 영.. 2024. 1. 11. [일본 근현대사]#37_일본, 국외 영토를 탐내기 시작하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 진출해야 한다는 사상은 일본을 군국주의 침략 노선으로 인도했다. 그 후 일본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열강의 후발주자이자 아시아의 돌연변이로서 특유의 야만성과 흉포함으로 수많은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였으며, 수천만 아시아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일본의 피비린내 나는 흥성은 인류 역사에 치욕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는 그때 입은 상처가 오늘날까지도 모두 아물지 않아 여전히 일본을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게다가 일본이 지난 역사에 대해 애매하고 잘못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아시아 국가들과의 사이에 깊이 팬 심리적인 골이 메워지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탈아론 1885년, 일본 사상계의 아버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운영.. 2024. 1. 11. [일본 근현대사]#36_메이지 헌법, 향후 일본 파시즘의 근원이 되다 제국 헌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천황과 군대에 관한 규정이다. 이것은 일본이 침략 전쟁을 도발하도록 하여 아시아와 세계에 크나큰 재앙을 안겨주었다. 결국 일본 제국을 철저히 패망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헌법 규정에 따르면, 육·해군의 통솔과 편제 그리고 병력을 결정하는 권한은 순전히 천황에게 있고 의회나 내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군대 통솔권이 독립적이고 군부가 천황의 직속 기관이기 때문에 군부의 권력이 막강해 심지어는 내각과 의회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천황의 자문기관인 원수부와 군사 참의원은 원수와 육·해군 대신,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으로 구성되어 완전히 군부의 세력에 속했는데, 군부의 의견을 천황에게 전달하는 권리를 가졌다. 따라서 대권을 좌우하고 내각 통제와 정부의 대내외 정책에.. 2024. 1. 10. 이전 1 ··· 3 4 5 6 7 8 9 ··· 1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