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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대항해시대의 서막 :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계를 양분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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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둘로 나눈 자오선, 토르데시야스 조약

 토르데시야스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다. 겉보기에는 초라한 작은 도시지만, 이곳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1494년 6월 7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곳에서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어이없는 조약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2,056킬로미터 떨어진 서경 48~49도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선을 그어 경계선을 그었다. 경계선 서쪽은 스페인이 권리를 독점하고 포르투갈의 해양 원정, 탐사 활동은 경계선 동쪽으로 제한하였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국가 간 영토를 분할한 조약이었다. 두 국가는 이 조약에 최종 타협안을 담았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 직전까지 두 국가는 대서양 바다 위에서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또한 양국 왕실에서는 화술과 외교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에 앞서 1481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로마 교황의 승인을 얻어 알카소바스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때 로마 교황은 포르투갈 국왕의 주권 보호를 골자로 하는 칙서를 내렸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이 '카나리아 제도 남쪽 및 기니 서쪽 부근에서 발견되는 모든 영토의 지배권을 가진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해양 탐험 선행국의 위치를 확실히 굳혔다. 그러나 1493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소식이 전해지면서 스페인은 이 조약에 문제를 제기했고, 교황의 칙서도 수정되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전 스페인 상황

 콜럼버스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항에 도착한 것은 1493년 4월 중순이었다. 스페인 부부 왕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두 왕 모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앞으로 국제 사회에 미칠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이 시기에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을 탐험할 함대를 준비해 놓았으며, 그제야 스페인 부부 왕은 신대륙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페인 부부 왕

이사벨 1세가 태어났을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나라바의 네 개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였던 이사벨과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였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은 스페인 통일의 첫 단추가 되었다.


 15세기말 유럽의 국제 규정에 따르면 비가톨릭 영토의 통치와 주권 귀속 문제는 교황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리고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데르 6세는 스페인 출신이었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페인 부부 왕 덕분이었다. 따라서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함대 준비를 문제 삼자 교황은 대놓고 스페인 편에 섰으며, 1493년 5월 3일 첫 번째 칙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당시 콜럼버스를 비롯한 유럽인 대부분은 아메리카를 인도로 알고 있었다) 부근에 이르는 신항로를 개척했다. 그는 바다 저 먼 곳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육지와 섬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들은 옷을 입지 않고 고기를 먹지도 않지만, 가톨릭을 따를 뜻이 있다고 한다. 이에 카스티야 왕과 그 계승자는 사절단을 파견해 새로 발견한 섬과 육지가 가톨릭 국가가 아닐 경우 이들에게 통치권이 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이 칙서는 스페인이 쿠바, 에스파뇰라섬(지금의 아이티), 바하마 제도에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확실히 승인했으나 스페인 국왕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로마 주재 스페인 대사가 교황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교황은 다시 남극에서 북극에 이르는 확실한 경계선을 명시한 칙서를 발표했다.

 "이미 공표되어 있는 아조레스 제도와 베르데 제도를 잇는 선상에서 서쪽으로 100 레구아(1 레구아는 약 5킬로미터), 남쪽으로 100 레구아를 경계로 한다. 이 경계선 서쪽에서 발견되는 영토가 가톨릭 국가의 소유가 아닐 경우 모두 카스티야로 귀속된다."

 비록 문자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당시 교황이 발표한 총 4개 칙서는 스페인의 세계 정복 야망을 부추기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교황의 칙서에 따르면 스페인은 서쪽과 남쪽 어디로든 항해할 수 있었고, 동방이든 서방이든 모든 지역을 그들의 땅으로 만들 수 있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전 포르투갈 상황

 이 경계선과 아프리카 사이의 해양에서 새로운 땅을 찾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던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는 이 두 개의 칙서가 자신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칙서대로라면 포르투갈은 한 세기에 걸쳐 힘들게 개척한 동방 항로를 스페인에 빼앗길 판이었다. 주앙 2세는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교황에게 항의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직접 스페인 부부 왕을 찾아가 담판을 짓기로 했다.

 포르투갈은 교황이 발표한 칙서를 일부라도 수정해 스페인의 세력 범위를 조금이라도 축소해야 했다. 포르투갈 국왕의 태도는 강경했으며, 스페인 부부 왕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두 왕은 스페인의 해군력이 아직 포르투갈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두 나라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서인도 제도 항해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후 두 국가는 약 100년간 이 조약을 성실히 이행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경계선입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 이후

 스페인 부부 왕은 토르데시야스 조약 내용에 흔쾌히 동의했다. 이 조약으로 콜럼버스가 지난 1년간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며 발견한 신대륙에 대한 권리를 확실히 보장받았고, 동시에 해양 강국 포르투갈과의 무력 충돌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포르투갈 국왕도 리스본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 협상 성공을 자축했다. 이 조약은 주앙 2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매우 성공적이었다. 포르투갈인이 몇 대에 걸쳐 100년 동안 공들여 개척한 아프리카 남쪽 해상 탐험에 대한 확실한 권리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 서남부 끝에 위치한 두 국가, 강력한 부와 힘과는 거리가 멀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 조약 체결 후 어떻게 세계를 주름잡은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이들은 어떻게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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