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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포르투갈] 대항해시대_왕자이자 그리스 기사단장이었던 엔리케

by 티제이닷컴 2024.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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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이 최초의 해양 탐험 국가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일 처음 항해를 국가 차원에서 계획하고 더 나아가 발전시켰다. 따라서 포르투갈의 항해 대발견은 개인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포르투갈의 항해사들의 200여 년 항해 노하우는 철저한 계획과 체계 아래 조직적으로 재정비되어 탁월한 성과를 이룩했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세우타) 점령

 역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1415년 세우타 점령을 포르투갈 해외 영토 확장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북서 아프리카의 도시 세우타는 1415년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가 이끄는 군대에 함락당했다.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슬람으로부터 세우타를 빼앗아 주앙 1세의 위엄을 드높이고 더 나아가 전 유럽에 포르투갈 국왕의 명성을 떨치고자 했다.

 그러나 세우타 점령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를 계기로 엔리케 왕자가 이끄는 항해 대발견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기사단장이었던 엔리케 왕자는 십자가가 그려진 돛을 단 그리스도 기사단의 배를 대서양 각지로 파견했다. 그의 함대가 첫 번째 탐험 목표로 삼은 곳은 보자도르 곶이었다. 당시 유럽의 배들은 이 곶을 감히 지나지 못하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엔리케 왕자는 과감히 이 곶을 지나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남하해 베르데 제도를 발견했다.


엔리케 왕자의 염원

 포르투갈의 항해 대발견은 엔리케 왕자의 개인적인 염원에서 출발했다. 왕자이자 그리스도 기사단장이었던 그는 포르투갈 왕실과 기사단의 도움으로 넉넉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엔리케 왕자의 업적을 기록한 왕실 사관이자 연대기 작가인 고메스는 엔리케 왕자가 항해 대발견을 하게 된 요인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1. 대서양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지적 욕구
  2. 전설 속의 프레스터 존(중세 서양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강대한 기독교국을 건설했다는 전설의 왕) 왕국 찾기
  3. 당시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함
  4. 수익성 있는 무역 루트 개척 필요성
  5. 가톨릭 전파

 그는 세계인 모두가 가톨릭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엔리케 왕자의 개인적인 다섯 가지 요인과 포르투갈의 사회적 요구가 결합하여 포르투갈은 빠르게 대서양 항해에 뛰어들 수 있었다.


과도한 국가의 간섭과 제약

 포르투갈의 항해 대발견은 대부분 엔리케 왕자와 페드로 왕자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 두 왕자의 항해 대발견은 대서양 제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후에 엔리케 왕자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비 가톨릭 세력, 특히 무어인(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무슬림을 지칭)을 제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엔리케 왕자가 죽은 후에도 국가가 직접 나서 해외 영토 확장 사업을 추진했다.

 브라질로 향하는 페드로 왕자의 항해 선단에는 개인 상선이 일부 섞여 있었는데, 이처럼 상인들도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확장 사업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토 확장과 관련된 모든 계획과 조치는 포르투갈 왕실, 특히 국왕의 직접적인 주도로 이루어졌다. 국왕은 리스본에 '인도회사'를 설립해 동방이나 대서양에서 들어오는 모든 선박을 대상으로 세금을 거두어 국가 재정에 귀속시켰다. 이 인도회사에는 북유럽 상품 판매소도 있었는데, 이것 역시 국가의 재정 수입을 위한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먼저 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아시아로 항로를 이어 나갔다. 18세기 이후에는 다시 대서양으로 세력을 확장해 브라질과 아프리카를 점령했다. 포르투갈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브라질에 노예로 데려가 그들의 노동력으로 금광 사업과 농업, 특히 면화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동방 영토 확장은 너무 과도했다. 이들의 영토는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이 영토를 관리할 포르투갈인은 턱없이 부족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찰스 버크스는 "포르투갈인은, 배는 불러 있었고, 정신은 굶주려 있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댔지만 이미 포화 상태여서 더 이상 소화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어느 단체든 한계 상황에 다다랐을 때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영토 확장도 마찬가지였다. 국가가 무역 활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기업이 독자적으로 무역과 경영을 책임지도록 했다면, 이러한 '소화 불량'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매우 성공적인 모델이었다. 영국도 '인도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프랑스와 덴마크, 스웨덴에도 비슷한 성공 사례가 있다. 그러나 유독 포르투갈은 이 부분에서 쓴 실패를 맛보았다. 이것은 포르투갈 상인들의 경영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지나친 국가의 간섭과 제약 때문이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인도양과 대서양에서 포르투갈의 강력한 맞수로 떠올랐고 포르투갈에 뒤이어 동방에 최대 식민지를 보유하게 된다. 영국은 이보다 조금 늦은 17세기말에 활발한 식민지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포르투갈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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