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참패하다
1812년 10월 19일, 나폴레옹은 결국 러시아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원래 나폴레옹의 계획은 계속 남하해 칼루가를 차지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두 번이나 쿠투조프에게 패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미 프랑스군에 의해 폐허가 된 스몰렌스크 거리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쿠투조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후퇴하는 나폴레옹을 군대를 조직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대열도 갖추지 못한 채 허둥거렸고 남은 인원들은 베르지나 강에서 다시 한번 공격을 당한 뒤 허겁지겁 국경으로 도망쳐버렸다. 쿠투조프의 재빠르고 시기적절한 전술은 무적이라 여겨지던 나폴레옹의 대군을 이렇듯 가볍게 격파했다.
이처럼 전세가 역전되자 러시아 병사들은 "러시아의 구세주 만세!"라며 쿠투조프를 소리 높여 찬양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병사들에게 다음처럼 대답했다. "됐네, 친구들이여. 그만하면 됐어. 오늘의 영광은 나만의 것이 아니네. 바로 러시아 병사들의 것이야. 러시아 병사 만세!"
프로이센 장군 브뤼허는 쿠투조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국왕 폐하께서는 저에게 장군이 파견한 군대를 지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실로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두 가지 영광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무적의 러시아군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영광과, 모든 민족이 존경해 마지않는 장군의 명령을 집행할 수 있게 된 영광입니다. 저는 이제 장군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쿠투조프의 사망과 러시아인들의 통곡
1813년 1월, 러시아 군대는 국경을 넘어서 서유럽으로 갔으나 쿠투조프는 이 전투가 진행되던 시기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웅을 잃는 것은 시대의 슬픔이자 전 국민의 슬픔이었다. 쿠투조프에게 냉담했던 알렉산드르 1세와 달리 러시아인들은 그에게 영웅에 걸맞은 예의를 갖추었다. 집집마다 도시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천 명에 이르는 러시아 국민들은 무릎을 꿇어 그의 영구차를 배웅했다. 쿠투조프의 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카잔 대성당에 안장됐다.
쿠투조프가 죽고 수년 후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이렇게 기억했다. "러시아에 용맹하고 강건한 국민들이 있다. 그들은 북극 근처에서 북극해를 마주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다." 또한 나폴레옹은 "러시아라는 거대한 괴물을 떠올리기만 해도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상대방은 옆에서도 뒤에서도 그들을 공격할 수 없지만 그들은 아무런 장애도 없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 또한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에 우리를 침몰시킬 수도 있다. 그들은 상대를 차가운 얼음층 깊은 곳에 밀어 넣고 고통과 근심의 수렁으로 빠뜨릴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패배한 첫 번째 인물도, 마지막 인물도 아니었다. 그 이전 17세기에는 폴란드군이 러시아에서 참패를 맛보았으며, 18세기에는 스웨덴이 러시아에서 패배했다. 서양의 일부 학자들은 그 원인을 러시아의 기후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에는 위대한 장군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엄동이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훗날 톨스토이는 쿠투조프를 위대한 장군이라며 추켜세웠지만 정작 쿠투조프 본인은 모든 영광을 자기 병사들과 국민에게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조국의 구세주다. 러시아는 그대들을 환영하노니, 그대들은 번개와 같이 진군하며 특별한 공을 세웠고 모든 러시아인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영원히 잊히지 않을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길이 이는 모스크바에서 조용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얼음과 꽁꽁 언 대지에서 러시아 민족의 위대함은 그렇게 지켜졌다.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쉬지 않고 전쟁했으며 마침내 나폴레옹의 마지막 힘까지 소진하게 했다.
나폴레옹 이후 드높아진 러시아의 위상
나폴레옹의 대군은 러시아를 폭발하게 만드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민족은 불굴의 정신력과 강한 의지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유럽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다시금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유럽에서 실추된 세력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에 유럽 세계는 오히려 더욱더 가슴을 열어주었다. 마침내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 신성 동맹의 맹주로 추대되기까지 했다. 언제나 스승을 찾아 헤매던 러시아는 유럽 세계에 성공적으로 발을 디뎠을 뿐 아니라 그들의 중재자 역할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유럽과의 교류를 실현했을 뿐 아니라 승리자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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