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군주제와 농노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다
프랑스혁명의 결과를 직접 목격한 러시아 귀족들은 더 이상 러시아의 현실을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었다. 프랑스의 평민들이 부활한 부르봉 왕조의 귀족들에게 평등과 자유를 요구할 때 러시아의 농노들은 여전히 귀족 지주의 채찍 앞에서 벌벌 떨어야만 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불길이 30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근대적인 공장조차 몇 개 갖추지 못한 채 여전히 수공업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유럽 세계에서 의회제가 보편적으로 인정될 무렵 미국은 이미 대서양 건너편에서 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군주 독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몽 군주는 이미 당위성을 잃었고 두 대제의 개방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는 진보에 대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이제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바로 새로운 현대화의 길이었다.
국가는 국민에게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세기 동안 이루어진 러시아의 개혁은 국민이 아닌 국가만 강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표트르와 예카테리나 개혁이 초래한 러시아의 문제점이었다. 든든한 기반 없이 강대해져 버린 러시아는 그야말로 모래성에 쌓은 거대한 성 신세였다. 강한 러시아의 군대 뒤에는 전제 군주와 한없이 나약한 국민이 있었다. 이처럼 가혹한 억압 위에 쌓은 영광은 오래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귀족 장교들은 더 이상 민족적 자긍심을 지켜나갈 수 없었다. 한 군인은 러시아의 수치스러운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제가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내자 우리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농민 하나가 황제가 탄 말 앞을 지나 길을 건너갔다. 그러자 황제가 갑자기 검을 빼어 들고는 도망가는 농민을 향해 말을 달리는 것이 아닌가. 경찰도 방망이로 그를 마구 매질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에 대한 존경 대신 가슴 가득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데카브리스트는 분노에 차서 반문하기도 했다. "우리가 유럽을 해방한 것이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우리가 프랑스인에게 주었던 헌법을 이제는 감히 토론조차 할 수 없단 말인가? 피를 흘려 되찾아온 국제적 지위는 고작 이런 수치를 위함이었나? 그랬다. 러시아가 진정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데카브리스트였던 파벨 페스텔은 일찍이 입헌 군주제를 주장해 왔다. 하지만 공화제와 민주제를 접한 후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공화주의자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통치 체제도 공화주의만큼 러시아에 행복과 안녕을 가져다줄 수는 없을 것이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1825년 12월, 3,000명의 근위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참정원 광장에 진입해 농노제 폐지와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이는 훗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라 불리게 된다. 계몽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 혁명가들은 러시아를 새로운 현대화의 길로 이끌고자 했으며 '러시아 법전'을 통해 농노제를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비판했다. "사람을 사유 재산으로 인정하거나 마치 물건처럼 양도하고 저당 잡으며 선물하는 것은 충분히 치욕적이며, 인간성과 자연법칙, 신성한 기독교의 정신을 위배하는 제도다. 이는 또 신의 계시와 뜻을 거스르는 악한 행위다."
또한 그들은 러시아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인간은 어떠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국민에게 소유되어야 한다. 또한 국가는 국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국민은 국가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반란이 실패한 뒤 몸수색을 당하던 데카브리스트들의 옷 속에서는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시구를 담고 있던 푸시킨의 시집 '자유'가 나왔다고 한다. "나는 세계가 자유를 노래하도록 할 것이다. 나는 황제의 자리에서 행해지는 모든 죄악을 처단할 것이다. (중략) 내 교훈을 받아들이라. 황제들이여, 먼저 자신들의 고개를 숙이라."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를 주도했던 5명의 지도자가 교수형을 당했으며, 121명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다. 또 반란에 적극 가담했던 병사들은 가혹한 매질 끝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모든 조치를 끝낸 니콜라이 1세는 이렇게 소리쳤다. "혁명은 러시아의 문 앞까지 왔다.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숨 쉬고 있는 한 그들은 절대 그 문을 넘어오지 못할 것이다."
현대화를 향한 러시아의 노력은 피로 물들여졌다. 귀족 혁명가들은 자기 재산과 지위, 가정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수호했던 제도를 배반하면서까지 자신과 국가, 민족의 운명을 동일시했다. 설령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 치듯 무모한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용감하게 일어나 황제의 전제 제도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들은 영웅으로 불리며 러시아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심지어 분노에 가득 찼던 황제조차도 그들의 용기에는 탄복할 정도였다.
레닌은 이들 데카브리스트를 '귀족 혁명가', 그리고 '귀족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민을 깨운 인물들'이라고 평가했으며, 이 시기를 '귀족 혁명 시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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