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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45_10월 혁명과 레닌,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수립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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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혁명 준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를 설득하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는데도 중앙위원회가 여전히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9월 29일, 레닌은 다시 한번 중앙위원회에 제안하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혁명에 찬성하지 않으면 자신이 중앙위원회를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레닌이 여태껏 한 번도 이러한 강경한 입장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레닌의 사직 의향을 담은 편지는 꽤 강력한 파급력을 보였다. 훗날 부하린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레닌의 편지가 너무나도 강경했던 나머지 우리는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누구도 그 문제를 그토록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의회의 해산을 명령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혁명의 성공을 의심했다. 이 때문에 레닌의 제안은 다시 한번 보류됐다. 10월 23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역사적인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회의가 열렸고, 당시 수배 중이던 레닌은 위험을 무릅쓰고 회의에 참석했다. 면밀하게 상황을 분석한 레닌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앙위원회의 위원들에게 경고했다. "더 이상 혁명을 미루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소.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자멸을 뜻하는 것이오." 마침내 회의는 10대 2의 지지로 레닌의 무장 혁명 제안을 통과시켰다.

 사실 이 회의가 개최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혁명의 성공은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의가 진행된 장소는 볼셰비키 적대 진영에 속하는 어느 책임자의 집이었다. 그 책임자는 자기 아내가 볼셰비키 당원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바로 자기 집에서 임시 정부 전복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몇 년 후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볼셰비키 당의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바로 내 집에서 모였었다니. 운명의 여신이 장난을 쳤구나."


10월 혁명

 레닌에게 혁명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그는 단 2주 만에 볼셰비키를 이끌고 혁명에 관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밤 9시 40분, 순양함 오로라의 대포 소리와 함께 수천 명의 군인과 국민들이 거센 파도처럼 겨울궁전으로 몰려갔다. 이것이 그 유명한 러시아의 10월 혁명이다.

 성난 군중이 겨울궁전을 점령하고 난 얼마 후 미국의 기자 존 리드는 네바 거리에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군사들과 마주쳤다. "당신들은 어느 쪽 사람입니까? 임시 정부 편인가요?" 그러자 한 군인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임시 정부는 벌써 끝났소." 이는 세계를 놀라게 한 찬란한 승리였다. 사실 민심이 이미 볼셰비키로 기울었기 때문에 혁명의 승리는 이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것이다.

 10월 혁명 전, 볼셰비키 당은 두 번에 걸쳐 압도적인 표를 얻었다. 처음에는 국민 투표를 통해 소비에트의 의석 6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두 번째는 군대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로써 페트로그라드의 군인 다섯 명중 네 명은 볼셰비키의 지지자가 됐다. 8만 명의 수군을 보유한 발트함대는 크론시타트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소비에트의 부름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무기를 들고나가 그들을 지원할 것이다." 당시에는 500명 정도의 군인만 있으면 혁명군의 본거지인 스몰니 사원을 얼마든지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시 정부는 그만한 병사를 모을 힘조차 없었다.


레닌 정상에 서다, 소비에트 정권 수립

 7,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만에 국민들은 러시아라는 거대한 배를 볼셰비키와 그의 키 작은 지도자 레닌에게 넘겨주었다. 혁명의 불꽃은 전국적으로 피어올랐다. 이로써 러시아에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고 레닌은 이를 '승리의 진군'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러시아 국민들은 무수히도 많은 '첫 경험'을 해야만 했다. 혁명군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발전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사회주의 제도가 진정으로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새로 태어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거울로 삼을 만한 본보기는 하나도 없었다.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레닌은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는 정권을 빼앗고 나서야 알게 됐다. 자본주의 제도를 사회주의 제도로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부터는 실전을 바탕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연설하고 있는 레닌의 모습입니다
연설중인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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