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시 공산주의
처칠은 영국의 육군 장관에 재임할 당시 볼셰비키를 요람에서 죽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한 경제학자인 케인스는 러시아의 터진 곳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력뿐이라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소비에트 연방은 승자의 대우를 받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에 휘말려야 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러시아를 공격해 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국가는 러시아에 무장간섭을 시작했고,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를 중심으로 하는 백군(반 볼셰비키군)은 신정권을 공격해 왔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전역은 불길과 연기로 뒤덮였으며, 적군이 많을 때는 동시에 24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 비해 러시아의 현실은 너무나 열악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농업 인구는 여전히 전 인구의 80퍼센트를 웃돌고 있었고, 공업 생산량은 국민 경제의 41퍼센트에 불과했다. 1913년 러시아의 철강 생산량은 미국의 11분의 1, 독일의 8분의 1, 영국의 6분의 1, 그리고 프랑스의 4분의 1 정도였으며, 1인당 GNP는 미국의 7분의 1, 영국의 5분의 1 정도였다.
본래부터 낙후되었던 러시아의 경제는 차르 시대의 혼란과 위기, 그리고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러시아의 공업 생산량은 전쟁 전의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쳤고, 철강 생산량은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 문제였는데, 당시의 식량 생산량은 전쟁 전의 절반 수준이었다. 한 번은 인민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식량부 부장이었던 추류파가 허기를 못 이겨 쓰러진 적도 있었다. 공산당의 모범 당원으로 뽑힌 추류파는 식량을 주관하는 최고 관리로서 식량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지는 않았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실험을 감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10월 혁명 이후 5년 동안 러시아에 주어진 과제는 발전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즉, 국내의 혼란과 서양 공업국의 침략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마침내 1918년 9월 2일, 소비에트 중앙위원회는 '전쟁을 위해,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시공산주의를 표명했다.
전시 공산주의
소련의 내전 및 간섭전쟁 시기인 1918년부터 1921년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방위하기 위해 취한 일련의 경제 정책이다. 전시 공산주의로 총칭되는 일련의 정책은 사회주의 단계를 뛰어넘어 단번에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최단 코스로 착각되어 전쟁 종료 후에도 계속되는 바람에 국민 경제는 한층 더 피폐해졌다. 결국 1921년 전시 공산주의에 마침표를 찍고 신경제 정책으로 이행했다.
이에 소비에트는 농촌에 남아 있던 식량을 전부 거두어들이고 도시의 산업과 유통 분배를 모두 통제했으며 총 관리국 체제를 시행했다. 정부가 기업과 국민 경제를 관리함으로써 기업의 자주권을 모두 빼앗아버린 것이다. 정부는 기업의 연도 계획, 분기 계획, 심지어는 월 계획까지도 대신 수립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는 신속하게 전시 체제에 돌입했으며 모든 힘을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구식 군대는 모두 해산되고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하는 적군이 창설됐다.
1919년, 전선에 있던 공산당원들에게는 수첩이 하나씩 주어졌는데, 그 수첩에는 러시아 전역에 퍼진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산당이라는 칭호는 많은 의무를 지고 있다. 하지만 공산당원들에게는 특권이 있다. 바로 혁명을 위해 가장 먼저 전쟁에 뛰어들 수 있는 특권이다."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충성스러운 당원들과 불굴의 인내를 가진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 덕분에 소비에트 정권은 세계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불가능한 임무를 완성해 낼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각국의 간섭과 침략을 막아냈으며 내부의 혼란을 불식시키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시 공산주의로 인해 소비에트는 모든 힘을 모아 전쟁에서 이기고 정권도 지킬 수 있었지만, 국가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고 말았다. 식량 생산량은 전쟁 전의 절반에도 못 미쳤으며, 공업 생산액도 13.8퍼센트나 감소해 국민들의 생활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볼셰비키 앞에 놓인 현실은 너무도 암담했다. 산산조각 난 벽돌로 전례 없는 새로운 모습의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역사에는 원래 정답이 없는 법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제도를 사회주의로 바꾸는 현실적인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는 오로지 볼셰비키가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기를 바랐다. "망하거나 전력투구해 앞으로 나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역사는 바로 이렇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라는 레닌의 말처럼 현실은 너무도 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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