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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6_표트르 대제의 집권 과정 첫 번째 이야기

by 티제이닷컴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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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 [러시아사]#5_표트르 1세의 유럽유학

 

[러시아사]#5_표트르 1세의 유럽유학

17세기 러시아는 위기 상황이었다. 기존에 있던 구시대적 발전 모델들이 이미 힘을 잃은 상태여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1697년 표트르가 유럽으로 1년간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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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2년 5월 30일 새벽,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모스크바 시내의 수백 개 종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러시아란 국가의 전통으로 따져 봤을 때, 이는 왕자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한껏 기쁨에 들떠 있었다. 이미 자식이 많던 그였지만, 건강한 딸들과는 달리 다섯 명의 아들들은 모두 허약했다. 그 중 세 명은 태어나자마자 요절하였다. 살아남은 두 명 중 첫째는 패혈증을 앓고 있었고, 둘째는 두 눈이 거의 실명 수준이었고, 지능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번째로 맞아들인 황후한테서 태어난 새로운 아들이 바로 표트르였다.

 운이 없던 건 알렉세이만이 아니었다. 표트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표트르 나이 겨우 4세 때 아버지인 알렉세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귀족들은 후계자로 첫째 아들을 골랐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첫째도 죽어버렸다. 이제는 황실은 표트르의 이복형제였던 소피아 공주를 위시해 이반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세력과 표트르 지지 세력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실질 세력은 이반 지지 세력이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근위대의 지휘권을 얻게 된 소피아 공주는 곧 표트르의 엄마 쪽 친인척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이를 생생히 마주한 표트르는 그 처참함을 잊지 못하고 평생 잔인함과 공포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훗날 사람들은 표트르가 가끔 발작을 일으킨 이유가 이 당시의 기억과 관련 있다고 추측한다. 결론적으로는 이반과 표트르 두 황태자 모두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실권은 소피아가 쥐게 되었다.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표트르의 어머니는 표트르를 프레오브라젠스키라는 곳으로 몸을 숨기게 하였다. 거기서 때를 기다리고자 하였다. 그곳에 거주하며 표트르가 가장 좋아했던 건 병정놀이였다. 그 놀이는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복누나였던 소피아에게 창과 폭약을 보내달라고 까지 하였는데, 정치가 아닌 병정놀이 따위에 관심이 쏠린 표트르를 보며 소피아는 쾌재를 부르며 창과 폭약에다가 대포까지 보내주었다. 이 어린애의 놀이가 훗날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 채로...

 프레오브라젠스키는 모스크바 근처 마을로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던 유일한 도시였다. 표트르는 곧 외국 군인들을 모집한 뒤 소년 병사들을 서양 군대 방식으로 훈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표트르와 같이 자란 아이 중에는 멘시코프처럼 훗날 표트르의 충신이 된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소년 부대는 이후 러시아 정식 군대로 출범하였다.

 점점 커가는 표트르를 보며 소피아는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종 충돌하곤 했는데, 마지막 충돌은 1689년 7월에 일어났다. 이 충돌을 기점으로 소피아 공주와 표트르의 황실에서의 입지가 서서히 결말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표트르 대제의 이복누나이자 권력 다툼을 했던 소피아 공주
소피아 공주. 출처 : 나무위키



[역사학] - [러시아사]#7_표트르 대제의 집권 과정 두 번째 이야기

 

[러시아사]#7_표트르 대제의 집권 과정 두 번째 이야기

1689년 7월, 근위대의 공훈을 의심하던 표트르는 원정에서 돌아온 근위대를 접견하려 하지 않았다. 표트르를 끌어내리는 데 혈안이던 소피아 공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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