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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5_표트르의 유럽유학

by 티제이닷컴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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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 [러시아사]#4_표트르 1세 이전 러시아의 현실 두 번째 이야기

 

[러시아사]#4_표트르 1세 이전 러시아의 현실 두 번째 이야기

표트르 1세 즉위 직전의 러시아는 매우 낙후된 수준이었다. 수공업 공장은 몇십 개에 불과하였고, 농노제라는 특성상 농업 발전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러시아 국민의 95%가 농노들이었는데 ,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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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러시아는 위기 상황이었다. 기존에 있던 구시대적 발전 모델들이 이미 힘을 잃은 상태여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1697년 표트르가 유럽으로 1년간 유학을 떠난 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러시아 황제라는 위치는 곧 하느님의 화신과 같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화신이 네덜란드와 독일의 제자라니... 러시아 입장에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경우였다. 그렇기에 그는 러시아 황제가 아닌 일반인의 신분으로 유럽에 갔다. 표트르 이전 러시아는 굉장히 폐쇄적인 국가였다. 마을에 외국인이 왔다 가면 주인은 옷을 벗어 불살라버리고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를 시키고 신부를 모셔 와서 세례까지 다시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반대로 서양을 배우기 위해 직접 유럽으로 갔다. 러시아인들에겐 다소 공감 못 할 행위였을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이 어찌 되었든 러시아인들에게는 러시아가 세계 제일의 국가였고, 러시아인만이 종교의 정통성을 유지하던 유일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라가 못 살수록 다른 쪽으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뽕에 차오르는 게 있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황제인 표트르 1세가 독일인과 네덜란드인의 제자로 들어간다는 소문이 퍼지니 그 사람은 실제 표트르가 아니며, 이미 황제는 살해됐다.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낙후된 러시아는 유럽의 이웃이기는 했지만 유럽의 일부는 되지 못하였다. 그나마 러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던 것은 농업으로 아마 유럽인들에게 러시아는 그저 농촌에 불과했을 것이다. 동방정교조차 유럽의 개신교와 천주교와는 다른 결이었으니 말이다.

  표트르의 유학과 훗날의 개혁은 강력한 해군을 만들려는 단 하나의 목표로 출발했다. 표트르는 이 해군으로 흑해와 발트해뿐만이 아니라 남쪽과 북쪽의 모든 바다를 누비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목표에 필요했던 것이 바로 유럽의 조선 기술과 군사력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가 네덜란드와 독일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해양을 제패한 네덜란드와 얼마 전 30년 전쟁의 전쟁터 한복판에 있던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과 그의 목표는 부합한 듯 보인다. 

 향후 러시아가 가는 길은 표트르가 닦아 놓은 길이었다. 분명 이것이 최선의 길은 아닐 수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표트르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피가 묻은 개혁을 추진했다. 급진적 변화를 위해 러시아의 현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개혁을 단행했다. 마치 그 이전에 러시아는 없었던 것처럼 백지 위에 새롭게 써내려 가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의 그런 행위는 이후 자신의 개혁을 반대한 아들을 사형시켜 버리는 모습에도 잘 드러난다. 표트르 대제는 그의 머릿속에 그려놓은 표트르의 러시아에 심취해 방해 요소들은 인정사정없이 철저히 짓밟았다. 이런 군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표트르 1세 초상화
표트르 1세. 출처 : 위키백과

[역사학] - [러시아사]#6_표트르 대제의 집권 과정 첫 번째 이야기

 

[러시아사]#6_표트르 대제의 집권 과정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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