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혼담도 하나의 전략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낸 데에는 앞선 여러 소문도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그녀에게 결혼은 가장 큰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 일종의 수단인 셈이었다. 즉위 후 20여 년 동안 엘리자베스에게는 수많은 구혼자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결혼을 국익을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볼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미혼이라는 조건을 이용해 유럽 각국의 쟁쟁한 구혼자들을 경쟁시킴으로써 그녀 자신과 잉글랜드를 적대시하는 유럽 내 적들을 차례로 무장 해제시켰다. 이렇게 얻어낸 정치적인 실리와 두둑한 예물이 잉글랜드의 안전과 그녀의 지위를 보장해 준 것이다.
엘리자베스 결혼 전략, 득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할 당시, 그녀는 꽃다운 스물다섯이었다. 잉글랜드에 눈독을 들이던 주변국의 국왕과 왕자들이 앞을 다투어 구혼해 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장 먼저 엘리자베스에게 장미꽃을 바친 사람은 바로 죽은 언니의 남편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였다. 언니 메리에 대한 미움 말고도 신교도 탄압에 가장 앞장섰던 펠리페였기에 이 구혼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는 스페인을 이용해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문제와 칼레항 문제를 두고 한창 프랑스와 협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스페인이 프랑스와 손을 잡지 못하도록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이 혼사에 대해 계속해서 확답을 유보했다.
런던에서 애타게 답변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스페인 대사는 펠리페 2세에게 자신이 런던 소식에 가장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보고했다. 프랑스와의 협상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자 곧바로 펠리페 2세의 청혼을 거절했다. 이 일은 후에 양국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또 다른 결혼정략의 희생자는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동생 알랑송 공작이었다. 1577년, 공작은 네덜란드의 신교도를 진압하러 출병하면서 엘리자베스에게 청혼 사절을 보냈다. 그녀는 재빠르게 셈을 놓았다. 만약 공작이 네덜란드를 향한 총부리를 거두고 신교도들과 손을 잡게 된다면 스페인의 공격에 공동 대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잉글랜드가 유럽의 신교도를 원조하기 위해 굳이 출병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작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무리수를 두었지만, 결혼식을 미루며 혼담을 계속 끌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에서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불쌍한 알랑송 공작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병들어 죽고 말았다. 여왕의 결혼과 잉글랜드의 외교정책은 이렇게 교묘하고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스스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으며, 국내외에서 들려오는 갖가지 유언비어를 참아내야 했다. 숨겨진 애인이 있다거나 아이를 여럿 낳았다는 악의적인 소문부터 대머리라거나 손가락이 6개라는 등등의 황당한 얘기까지 떠돌았다. 심지어 여왕이 실은 남자라거나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라는 등의 이상한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떠도는 풍문은 일시적인 호기심을 자극할 뿐,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담하고 지혜로운 통치술이야말로 우리에게 더 큰 교훈과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결혼 전략, 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결혼 전략이 낳은 부정적인 결과는 50여 년이 흐른 뒤에 나타났다. 그녀에게 남편도 아이도 없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왕위 계승 문제가 계속 불거져 나왔다. 야심가들은 모반을 꾀하며 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후기에는 몇 차례 중대한 반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여왕은 그들을 함부로 처단하지 않고 신중히 처리했다. 단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을 때만 마지못해 사형 집행에 동의했을 뿐이다.
반란 사건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의 모반이었다. 메리의 할머니가 헨리 8세의 누이였으므로 자식이 없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같은 튜더 가문인 그녀에게 영국의 왕위를 물려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 여왕은 큰 키에 뛰어난 미모를 가졌지만 군주로서의 현명함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녀는 몇 차례의 무분별한 결혼과 어리석은 처신으로 스코틀랜드 국민들의 원성을 샀고, 급기야 반란이 일어나자 잉글랜드로 피신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vs 메리 스튜어트
엘리자베스 여왕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촌 조카인 그녀를 불쌍히 여겨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되찾는 일을 돕지는 않았다. 그러자 메리는 도리어 은혜를 원수로 갚기 시작했다. 가톨릭교도였던 메리는 로마 교단과 가톨릭을 고수하는 일부 봉건 귀족, 그리고 스페인 정부의 지지를 업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위를 모두 차지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곧 가톨릭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메리의 음모도 발각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사형이 아닌 20년의 감금형을 선고하게 했다. 그러나 메리는 감금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반란을 획책하며 잉글랜드의 안위를 위협했다. 결국 결정적인 암살 음모가 적발되자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쩔 수 없이 메리의 친아들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고 메리를 단두대에 세우게 된다. 이로써 가톨릭의 오랜 반란도 평정되었다.
이와 같은 반란 사건을 처리할 때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그 이해득실과 결과를 따져 보며 심사숙고했다. 가능한 인명의 살상을 줄이고 사회적 혼란을 피하면서 국내외 적들의 반격을 방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그녀가 고도의 정치적 지략과 관용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여왕이 오랫동안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관대한 처리방식으로 많은 갈등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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