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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18_대작가 셰익스피어의 탄생과 엘리자베스 1세

by 티제이닷컴 2024.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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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가 셰익스피어의 탄생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리더십은 문화 예술 분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그녀는 연극에 대해 아낌없이 지원함으로써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활동할 공간을 넓혀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에는 서적 및 연극에 대한 검열제도가 아주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던 성실재판소는 언론, 출판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이곳에서 단죄받으면 참수형에서부터 사지를 찢거나 내장을 파내는 등의 잔혹한 형벌로 다스려졌다. 토머스 모어 경도 여기에서 재판받고 처형당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이런 잔혹한 처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성실재판소
 과거 영국 왕실에서 정규 재판을 보완한다는 미명 아래 주로 정적을 탄압하기 위해 열던 형사재판소. 웨스트민스터 궁전 내에 별 모양으로 천장을 장식한 방에서 열렸다 하여 '성실(star chamber)'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자유로운 풍토는 특히 예술 방면에서 셰익스피어가 불후의 명작들을 탄생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오늘날 이 대가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인간의 본질과 생명의 가치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런던 템스강 남쪽에 '글로브'라는 극장이 있었다. 총 3,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극장은 보통 오후 2시경이면 막이 올랐다. 이 극장을 즐겨 찾던 관객 가운데 여왕을 비롯한 귀족들과 부자들은 나무로 짠 특별석에서 연극을 관람했고, 일반인들은 극장 한가운데 바닥을 이용했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장의 주주이자 배우 겸 극작가였다.

 1601년, 이 최고급 극장에 정체 모를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큰돈을 내밀며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를 공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1막이 끝났을 때 런던 시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메리 스튜어트 사건만큼이나 유명한 에식스 백작의 반란 사건이다.

 에식스 백작과 그의 동료들은 반란을 모의하면서 이 극의 1막 중에 국왕이 폐위되는 장면을 행동 개시의 신호로 삼았다. 그 바람에 불쌍한 배우들은 아무 죄도 없이 반란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하지만 더욱 극적인 것은 이 반란 사건이 평정된 이후에도 '리처드 2세'의 작가나 배우는 물론, 이 연극과 관련된 극단의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관대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많은 셰익스피어 연구자는 셰익스피어의 역사극과 비극 작품이 모두 강한 반전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궁정의 비리를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극 중에 등장하는 군주들은 모두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너그럽고 후덕했지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도 분명 이 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가 공연될 때, 여왕은 사람들이 이 연극을 통해 리처드 2세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극 중에서 리처드 2세는 반대파에 의해 강제 폐위되어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작가를 투옥하지도, 또 공연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단지 "저 작품이 벌써 40번이나 공연됐다는구나."라고 한숨만 쉴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연극 검열관은 오히려 희극 작품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헨리 4세'에 등장하는 뚱보 기사 폴스타프의 원래 이름은 존 워드 캐스터 경이었다. 그런데 잉글랜드에 동명의 가문이 있었기 때문에 공민의 명예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 검열관은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극 중의 이름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결국 셰익스피어는 존 워드 캐스터를 폴스타프로 고쳤다.

 영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희극 캐릭터 폴스타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는 '헨리 4세'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나머지, 셰익스피어에게 폴스타프를 부활시켜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다.

 셰익스피어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자신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몇십 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우리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크롬웰이 권력을 잡은 이후, 그가 첫 번째로 내린 명령이 바로 런던의 극장을 폐쇄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찰스 1세의 목도 떨어져 나가는 살벌한 시대에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작가라 해도 그 목숨을 보장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1601년, 셰익스피어의 신작 '햄릿'이 런던에서 공연되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 당시 햄릿 역을 맡은 배우가 이 유명한 대사를 읊조리고 있을 때, 무대 맞은편 좌석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여왕이 앉아 대수롭지 않은 듯 지켜볼 따름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연극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열린 마음으로 국사를 보았고, 덕분에 영국은 안정적인 발전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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