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의 하원 무단침입
오늘날 런던을 방문하는 외국 여행객들은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전통 의식에 깊은 인상을 받곤 한다. 특히 이 전통 의식의 배경에 전해지는 일화를 알게 된다면 더욱 의미심장할 것이다.
템스강변에 자리한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영국 의회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매년 영구 국왕이 의회를 방문해 연설할 때는 이곳에서 30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영국 전통의 독특한 의식이 거행된다.
먼저, 영국 국왕이 상원에 출석하면 검은 지팡이를 든 사절이 하원의원들에게 국왕의 출석을 알리고, 상원으로 건너와 국왕의 연설을 들을 것을 통지하기 위해 건너편 하원 회의장으로 간다. 하지만 사절이 하원 근처에 도착할 즈음, 하원의 경비병은 그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회의장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면 사절은 하원 회의장 문고리를 검은 지팡이로 세 번 울린다. 이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뜻이다.
하원의장의 허락을 얻은 후에야 경비병은 회의장 문을 열어준다. 하원에 들어선 사절은 하원의장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춘 후 국왕의 교지를 전한다. 그러고 나서야 하원의장의 지시 아래 모든 하원의원이 상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이 의식은 1642년에 벌어진 중대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당시는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1642년 1월, 찰스 1세는 무장한 추종자들을 대동한 채 직접 하원으로 쳐들어갔다. 존 햄던 사건에서 본인이 아닌 핸덤을 지지한 5명의 국왕 반대파 지도자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원의장이 그들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의회의 결정만을 따를 것이라고 말하며 5명의 의원을 넘겨 달라는 국왕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하원의장의 결연한 기세에 찰스 1세는 수모만 당한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의원들은 회의장에서 찰스 1세의 폭력적인 난입을 규탄하며 "특권!"이라고 소리쳤다. 그 후 하원에서는 당시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앞서 말한 의식을 거행하게 됐다.
찰스 1세는 이 5명의 의원을 잡는 데 혈안이 되어 런던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그의 행위는 격렬한 반감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런던 시민들이 이들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장을 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찰스 1세는 국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런던을 떠나 잉글랜드 북부에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영국 내전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왕권에 도전한 존 햄던 사건
찰스 1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선박세'를 신설해 세금을 부과했다. 명목상으로는 해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실상 비용은 해군에 쓰이지 않았다. 이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럴싸한 명목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 반대파는 이를 독재의 전형적 형태로 간주하고, 국왕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고자 힘을 쏟았다.
이때 존 햄던은 국왕의 세금 부과가 의회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고 의회를 부정한 불법행위라고 논박하면서 찰스 1세를 법의 심판을 받는 처지로 몰아넣기에 이른다. 즉, 햄던은 선박세 납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회부되자 이 재판 결과를 전국에 공개하도록 유독한 것이다.
이 재판의 중대한 의의는 바로 대중이 다 알도록 모든 지역에 보도하게 하는 데 있었다. 재판은 소규모의 하급법원이 아닌 대법원에서 진행했다. 당시의 서신이나 소식지, 일기 등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문건들을 보면, 많은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권력을 독점한 군주와 의회의 동의를 거친 세금만을 내겠다는 국민 간의 대립으로 보았다. 국민들은 법원의 판결을 떠나 스스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이 때문에 비록 햄던 사건은 7대 5로 패소하긴 했지만, 존 햄던은 영국의 국민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반면, 국왕은 절대적 권력에 큰 오점을 남기고, 왕권은 도전받게 되었다.
찰스 1세가 민심을 얻지 못한 이유
찰스 1세가 곤경에 처하게 된 이유는 재정과 종교 문제에서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재정 문제로서, 그는 1620년대에 이미 유럽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여 당대 최강대국인 스페인 및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느라 국고를 탕진해 버렸다. 이에 따라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고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고, 의회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찰스 1세는 재정 위기가 심화한 상황에서 의회를 설득할 수 없게 되자 아예 의회를 해산해 버리고 또다시 세금 징수를 강행했다.
이제는 사람들이 찰스를 '전제주의 독재자'로 인식하면서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두 번째 문제는 사람들에게 가톨릭과 유사한 종교 형식을 따르도록 강요함으로써 종교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비록 완전한 가톨릭은 아니지만 다분히 가톨릭처럼 보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다시 잉글랜드를 로마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1630년대 찰스 1세가 통치하던 시기의 영국 국민들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고심하게 된다. 첫째는 군주가 독재자라는 것이고, 둘째는 잉글랜드가 가톨릭 국가로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근심거리는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제왕권은 가톨릭의 공포와 맞먹었고, 가톨릭 역시 전제정치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했다. 이런 상황이 맞물려 1640년에 이르러서, 전 국민이 찰스를 등 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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