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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35_크롬웰 이후,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집권한 영국

by 티제이닷컴 2024.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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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2세의 왕정복고

 왕실이 다시 들어선 이후 잉글랜드는 피의 보복으로 인해 공포감이 진동했다. 찰스 1세의 처형을 주도했던 크롬웰 경과 당시 재판장이었던 브래드쇼 경은 국왕 시해죄를 선고받고 부관참시에 처했다. 그들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은 사정없이 베어져 교수대 밑에 다시 매장되었다. 위대했던 호국경도 국왕 찰스 1세처럼 목이 잘려 나갔지만, 사후는 그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왕당파는 부패한 시체 두 구에 광기 어린 분노를 쏟아냈다. 그들은 크롬웰의 머리를 찰스 1세가 재판을 받았던 웨스트민스터 홀 꼭대기에 내거는 것으로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마무리 지었다.

 과거에 혁명이 고조되면서 수모를 겪었던 의원들은 이제 의회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귀한 의원들에게는 크롬웰에 대한 증오심보다 그의 썩은 해골을 수시로 봐야 하는 것이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던 해골을 끌어내리기로 결정했다.

 크롬웰 경의 머리는 시중으로 흘러 들어갔다. 유골은 밀거래상들 사이에서 골동품처럼 매매되다가 그로부터 300년 뒤인 1960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서식스 칼리지에 안치되었다.

 왕당파들이 아무리 복수의 칼을 간다고 해도 크롬웰 경은 어차피 죽은 사람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국왕의 처형 판결문에 서명했던 의원들 가운데 생존자들이 불행을 맞이할 차례였다. 그들 중 9명은 목이 잘려 나갔고, 15명은 모든 것을 잃고 국외로 떠돌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복한다고 해도 잉글랜드에서 전제정치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찰스 2세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회에 맞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보복이 일단락되자 찰스 2세는 곧 보은하기 위해 나섰다. 망명 시절에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1638~1715)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보답으로 그는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크롬웰이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항구도시 됭케르크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영국은 유럽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유일한 거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영국의 대외무역에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찰스 2세와 의회는 아직도 근본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브레다 선언에서 누가 최고 권력을 행사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국왕인가? 아니면 의회인가? 국왕과 의회의 권력 다툼은 찰스 2세의 재위 기간(1660-1685) 동안 불씨로 남아 있다가 또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이번 분쟁의 주인공은 찰스 2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1633~1701)였다.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 왕위에 오르다

 1685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찰스 2세가 눈을 감았다. 19세에 아버지를 비참하게 여의었고, 중년에는 유럽 대륙을 떠돌아야 했으며, 말년에는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 뇌출혈로 쓰러져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그는 며칠 밤낮을 고민한 끝에 왕위 계승자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가 마침내 왕위에 등극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왕좌와는 인연이 깊지 못했다. 그는 즉위한 지 3년 만에 사위이자 네덜란드 총독인 오라녜 공 빌럼(영어명은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왕위를 빼앗겨 버렸다. 빌럼 총독은 원래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준 인물이었지만, 종교적 차이로 왕위 쟁탈까지 벌이게 되었다.

 국왕 일가가 치열한 왕위 다툼을 벌이자 의회는 내심 이를 반기며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2세가 재위 중 일찍이 없었던 왕실 상비군을 설립했을 때, 의회는 조바심에 속이 타들어 갔다. 이는 분명 전제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세력의 확장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국왕이 가톨릭교도 장교들을 다수 임용한 데 대해 의원들이 불만을 표하자 제임스 2세는 1685년 의회의 휴정을 선언했다. 1687년,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가톨릭에 반대하는 법률의 집행을 중지한다는 내용으로 '신앙 자유령'을 선포했다. 이와 같은 조치는 신교도들의 일치된 저항에 불을 지폈다. 영국인들은 제임스 2세를 보며 군권을 장악해 독재정치를 펼쳤던 크롬웰을 떠올렸다.

제임스 2세
제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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