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영국

[영국]#36_ 1688년,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7. 28.
728x90
반응형

제임스 2세는 가톨릭신자였다

 제임스 2세는 곧 영국국교회와 사회 각 계층의 저항에 직면했다. 군인들조차 더 이상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영국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미 통치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대다수 영국인은 이 고집 센 늙은이가 하루빨리 죽고 신교도인 그의 딸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기를 염원했다.

 국민들은 국왕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무력으로 왕위를 전복시키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합법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1만 6,000명의 군인을 런던에 주둔시키며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세는 급변했고, 1688년의 런던은 1642년에 영국 내전이 시작되던 때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영국은 또 한 차례 역사적인 갈림길에 서 있었다.

 역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또 한 번 희극을 연출했다. 제임스 2세의 실각에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아들의 탄생이었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제임스 2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곧 위기가 닥치리라는 것과, 그것이 갓 태어난 자기 아들로 인해 촉발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국왕이 죽고 나면 신교도인 그의 딸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던 국민들은 왕자가 태어나자 절망했다. 그들은 가톨릭 환경에서 자란 왕자는 분명히 가톨릭교도가 될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그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릴 참이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해서 무언가 행동을 해야 했다.


청교도혁명 때와는 다르다. 명예혁명

 찰스 2세의 치세 말기인 1683년에 자유와 권리에 대한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한 한 영국 철학자는 자유에 대한 이념을 기술한 '통치론(원제는 '시민 통치에 관한 두 편의 논고')'을 발표했다. 그가 바로 존 로크(1632~1704)이다.

 로크는 이 위대한 저서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상을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인 존재이다." 이는 영국 사회의 핵심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다. 1세기가 지난 후, 우리는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의 '인권선언'에서 이와 유사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의 근대 민주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통치론'에서 로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일종의 계약 관계가 성립된다. 통치 권력은 피지배자의 동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일단 계약이 파기되면 저항은 합법적인 권리가 된다."

 로크는 또 이 책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분권 사상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본래부터 존재하는' 자유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1642년, 영국 국민은 무기를 들고 분연히 일어났다. 그렇다면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에 반대했던 영국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저항 의지를 표출했을까? 영국인은 과거에 있었던 왕조 교체기에서 교훈을 얻어냈다. 그들은 크롬웰의 실패를 거울삼아 또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688년, 영국 국민들은 전통적인 계약 방식과 일맥상통하는 개혁 방안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때의 혁명은 현대 정치 문명의 새로운 규범을 제시했다. 정치적 분쟁 중에서도 비폭력 원칙을 고수했다. 물론 폭력 사태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해 6월 30일, 영국 의회의 유력 인사 7명은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네덜란드로 보낼 초청장의 초안을 작성했다. 편지의 내용은 제임스 2세의 사위인 네덜란드 총독 빌럼과 그의 부인인 메리를 영국으로 초청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종교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리고 서명인들은 편지에 영국 국민의 20명 중 19명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의회는 모든 것을 고려한 후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빌럼 총독의 부인은 바로 제임스 2세의 맏딸이었고, 이 부부는 둘 다 신교도였다. 이는 왕위의 정통성에 위배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국교회의 원칙에도 부합했다. 이 사건은 청교도혁명처럼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거치지 않고 국민들의 희생도 없이, 오로지 통치 계급 스스로가 일구어낸 최초의 '자유를 위한 수호'였다. 이 거사가 성공한다면 왕권 강화를 막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 당시의 선택이 현명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제임스 2세는 전제왕권 체제에 복귀하려다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빌럼 총독이 윌리엄 3세(1650~1702)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장인을 왕위에서 끌어내렸지만 목을 베지는 않았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성명한 혁명이었기에 역사는 이를 '명예혁명'으로 기록한다.

 혁명은 1642년에 크롬웰이 시도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마무리되었다. 영국에는 입헌군주제가 도입되고 국왕은 의회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오늘날까지도 그 빛을 발하고 있는 입헌군주제는 바로 이 명예혁명을 통해서 탄생했다.

윌리엄 3세
명예혁명으로 영국의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