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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39_영국 부부 왕의 탄생과 영국-네덜란드 전쟁

by 티제이닷컴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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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3세와 메리, 영국의 부부 왕이 되다.

 1688년 12월 11일 새벽, 제임스 2세는 조용히 왕궁을 떠나 아일랜드로 향했다. 하지만 가던 도중 그는 한 어부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시민들에 의해 죄인처럼 런던으로 압송되어 왔다. 난처해진 윌리엄은 사람을 보내 제임스 2세에게 18일 오전까지 런던을 떠나라는 말을 전했다.

 이때 또 다른 희극이 연출되었다. 제임스 2세는 로체스터 성으로 몸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루라도 빨리 왕좌에 오르고 싶었던 윌리엄은 장인과 시시콜콜 협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제임스 2세의 요청을 수락했다. 윌리엄은 런던에서 로체스터로 가는 모든 육로를 봉쇄한 것처럼 꾸몄다. 장인이 수로를 통해 로체스터로 도망가도록 해준 것이다.

 로체스터에 도착한 제임스 2세는 그곳에서 프랑스로 도망쳤다. 윌리엄은 제임스 2세가 궁을 떠나자마자 곧바로 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이 희극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겉보기에 윌리엄이 자기 외숙이자 장인을 축출한 왕실 내부의 집안싸움처럼 비칠 수 있다. 그저 국왕이 바뀐 것 말고는 아무 변화도 없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국왕이 탄생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제임스 2세가 물러난 후, 윌리엄은 각 지역의 대표들을 런던으로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국가의 현안을 함께 의논하도록 했다. 이 회의가 후에 진정한 의미의 '의회'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이 회의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 "제임스 2세는 스스로 국왕의 지위를 버리고 자신의 책임을 방치했다. 스스로 왕위를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국왕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쪽에서는 공적에 따라 윌리엄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왕위 계승 순서에 따라 제임스 2세의 맏딸인 메리를 여왕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양쪽은 팽팽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타협하기로 하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바로 윌리엄 부부가 공동으로 왕위에 오른다는 결정이었다.

 1689년 2월, 의회는 윌리엄을 영국의 국왕으로, 메리를 여왕으로 하여 공동으로 영국을 통치한다고 선포했다. 당시 어느 귀족은 이렇게 말했다. "바로 오늘, 영국에서 군주제도는 붕괴하였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서 왕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국왕을 뽑는다는 것은 신민이 국가를 관리할 권력을 국왕에게 부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왕권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신민이 부여한 것'이 된다. 이는 왕권 자체의 본질적인 의미를 변화시켰다. 이렇게 영국은 전제 정권에서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기 이르렀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7세기 영국에게 네덜란드는 해상 패권을 다투던 적수였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해외 무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다. 네덜란드인은 북아메리카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움직였고, 허드슨강 입구에도 식민지를 건설했다. 식민지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영국은 해군력을 집중적으로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제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1664년 3월, 찰스 2세는 새로운 선전포고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는 북아메리카 허드슨강 입구에 있는 네덜란드 소유의 뉴네덜란드를 자기 동생인 요크 공작에게 수여한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때 9월, 뉴암스테르담 시를 점령한 뒤 '뉴욕'으로 명명했다. 분노한 네덜란드인은 즉각 영국과의 전면전 태세에 돌입했다. 찰스 2세는 런던 자치구에서 20만 파운드를 빌려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영국은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빼앗은 1,700여 척의 네덜란드 상선을 바탕으로 전함을 2배 가까이 증강했다.

 1665년 3월, 마침내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개시되었다. 영국 의회는 찰스 2세에게 500만 파운드의 군사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은 전쟁 초반의 승리를 이어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영국은 프랑스와 덴마크가 네덜란드 편으로 등을 돌리는 바람에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667년, 네덜란드 함대는 메드웨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채텀에 정박 중이던 영국 함대를 파괴함으로써 런던까지 위협했다. 찰스 2세는 사태가 불리한 것을 깨닫고 네덜란드와 그 동맹국들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1667년 7월 21일, 영국은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의 브레다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 전쟁은 패배한 영국에게는 물론, 승리한 네덜란드에도 막대한 피해를 줬다. 이후 1672년에 영국이 도발한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참패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영국은 명실상부한 해안 강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메드웨이 기습
메드웨이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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