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장전과 입헌군주제 확립
1689년 2월 13일, 의회는 윌리엄 부부를 위해 웅장하고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전례는 까다롭기 그지없었지만, 새로운 국왕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에 대한 신민들의 애정과 신뢰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때의 대관식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의회 대표였던 핼리팩스 경이 두 군주에게 왕관을 헌납하고, 잠시 후 의회의 정신을 담은 주요 문건인 '권리선언'을 국왕들에게 전달했다. 이미 합의된 내용이었기에 새로운 국왕 부부는 대중을 향해 '권리선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을 계승한 이 선언문은 영국 사회의 자유주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각종 '권리'를 시민과 국왕 사이의 '계약' 형식으로 규정한 영국 헌정 제도의 근간이 되는 문건이었다.
영국인들이 이 의례를 통해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윌리엄 부부는 선거권자의 동의 아래, 그리고 선거권자의 조건을 수락한 후에 비로소 국왕으로 등극했다는 점이다. 이 '권리선언'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유명한 '권리장전'이다.
영국은 이 법안에 따라 '의회가 왕권보다 높다.'는 정치적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입헌군주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권리장전'에 따르면, 국왕은 의회가 정한 법률에 따라서만 행정을 집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법안은 전혀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회가 최고 권위를 지닌다는 기본원칙을 최종적으로 확립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국왕의 자문기구인 추밀원도 내각으로 전환되었다.
그 후 의회는 '권리장전'을 통과시켰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의 폐지를 명할 수 없고, 임의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으며, 군대를 모집하거나 상비군을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국왕이 개인적으로 둘 수 없으며, 반드시 의회의 논의를 거쳐야 한다고 명시했다.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이후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을 통해 점차 완성되어 갔다. 1689년에 이르러 영국은 일개인이 아닌 하나의 집단이 나라를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모두 귀족이었지만, 공동 통치라는 것만으로도 인류 역사상 위대한 진보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 작은 섬나라에서는 이제 한 사람이 나라를 통치하는 시대가 정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릇 혁명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무혈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이를 명예혁명으로 기록한 것이다.
영국 민주주의의 변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혁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개혁이다. 역사 속에서 운명의 여신은 영국을 '개혁'의 길로 이끌어왔다. 물론 때로는 혁명을 택하기도 했다. 혁명은 전쟁을 의미한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재산이 손실되며, 기존의 정치제도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 혁명이 끝난 후에도 사회는 오랫동안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 1689년 '권리장전'에 이르기까지, 영국인은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 많은 피를 흘려왔다. 명예혁명과 같은 평화적인 변혁의 길을 택하면 기존 제도의 합리적인 부분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제도를 확립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변혁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영국인은 현실적인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사업가 기질을 갖고 있다. 원대한 목표나 완벽한 이론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심지어 완전한 헌법도 없는 실정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실용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해 온 것이다.
명예혁명을 통해 전통적인 정치체제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후 영국은 의회의 틀 안에서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정치제도를 완성해 왔다. 또한 입헌군주제는 이후 영국의 경제발전과 비약적인 성장에 유리한 정치적 토양을 제공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영국이 산업혁명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변방의 작은 섬나라가 점차 세계 중심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그 나라는 이후 2세기 동안 전 세계를 호령하게 된다. 영국이 전제 정권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있을 때, 프랑스는 전제 군주가 한창 번창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남북으로 정복 전쟁을 벌이며 전제왕권을 수립하는 중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토가 사분오열된 채 국민들이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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