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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44_유럽 열강의 각축전

by 티제이닷컴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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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열강의 각축전

 1500년 이후 강대국 간의 경쟁에서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한 세기마다 영국의 경쟁상대가 바뀌었고, 상대국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영국은 더욱 강대해졌다는 점이다.

 16세기에 영국의 적수는 스페인이었다. 영국인은 이 노련한 식민지 강국을 침몰시키고 새로운 해양 강국으로 떠올랐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를 누르고 세계 최강의 해양 강국으로 등극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쟁탈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접전을 벌인 결과, 승리를 얻게 된다.

 1688년의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바다의 마부'로 불리던 네덜란드를 꺾고 신흥 해상 패권국이 되었다. 하지만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유럽 대륙의 패권국가인 프랑스와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양국의 분쟁은 약 1세기 동안 지속되면서 유럽에서 갈등의 축을 이루었다. 결국 7년 전쟁이 끝난 1763년,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들 신흥 강국의 패권 다툼은 1701년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00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자 유럽 각국 왕실은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에 눈독을 들였다. 이 문제로 각국의 왕실 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손자인 필리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선포하고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가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스페인 연합군에 맞섬으로써 전쟁은 열강들의 각축전이 되었다.

 10여 년이 지나도록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고 양측은 지칠 대로 지쳐 갔지만,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국은 이미 이 전쟁에 약 1억 파운드 이상의 군사비를 퍼붓고 있었다. 결국 셈이 빠른 영국인들은 프랑스와 협상을 시도했고, 체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713년부터 2년에 걸쳐 양측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영국 신교도 국왕의 계승권을 인정했으며, 루이 14세의 손자가 스페인 국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은 합병하지 않고 독립된 국가체계를 유지했다. 또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인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 허드슨만을 영국에게 할양하고, 스페인은 지브롤터와 메노르카섬을 영국에게 할양했다. 이때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스페인 식민지에 독점 공급할 권리를 얻어냈다.

 이 전쟁은 유럽 왕가의 깃발 아래 치러졌지만, 그 이면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패권 다툼이 있었다. 영국은 실리를 챙겨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올라섰지만, 실제로 손해가 막심했던 프랑스는 절치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30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비밀연맹을 맺었다. 스페인 역시 지난 전쟁에서 영국에게 식민지를 빼앗긴 치욕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은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간 지브롤터를 탈환하는 데 협조해 주는 대가로 프랑스에 스페인 식민지에서의 무역 특권을 넘겨주기로 했다.

 이윽고 스페인이 식민지 지역에서 영국인에게 도발을 감행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스페인 해안경비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영국의 불법 노예 밀수선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심지어는 합법적으로 무역을 하는 상선들까지 체포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 결과 1713년부터 1737년까지 약 180척의 영국 상선이 스페인 해안경비대에 나포되었다. 영국의 상인들은 원금도 못 건진 채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자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영국 정부가 스페인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브롤터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영국의 '지브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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