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를 향한 꿈, 그 막을 내리다
어떤 위기든 늘 복잡한 요인이 얽히고설켜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옆에서 항상 기회를 노리는 적수가 있다면 더더욱 위험하다. 포르투갈에 최초로 위기의 불씨를 남긴 왕은 바로 1557년에 서거한 주앙 3세이다. 주앙 3세가 세상을 떠나자 포르투갈 역사에 수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역사는 포르투갈 왕조 역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위 계승자의 능력과 자질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주앙 3세의 뒤를 이은 왕은 손자 세바스티앙이었는데, 겨우 세 살 배기였다. 국왕이 나이가 어린 경우 보통 왕후가 섭정했는데, 주앙 3세의 왕비는 바로 신성로마 제국 카를 5세의 여동생인 카타리나였다. 국민들은 카스티야인이 포르투갈을 다스리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카타리나의 섭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1562년 카타리나 왕후는 결국 5년 만에 물러났고, 주앙 3세의 유일한 혈육인 동생 엔리케 추기경이 섭정을 맡아 어린 국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을 돌보았다. 그러나 이 어린 국왕 앞에 펼쳐질 세상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세바스티앙의 스승은 그에게 동방 항로가 개척되고 향료 무역이 시작되면서 포르투갈은 '슬픔에 억눌린 나라'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즈음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식민지에서 온갖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당시 국정을 돌보고 있던 엔리케는 "인도 통치는 오직 하느님의 보살핌이 있어야 가능하다."라고까지 말했다.
향료 무역은 과잉 선적, 해상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위험 요소 등 골치 아픈 문제가 한둘이 아녔다. 아조레스 제도와 리스본 사이 해상에서는 네덜란드, 영국 등 각국의 수많은 해적이 포르투갈 상선을 수시로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따라서 포르투갈 왕실에서는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을 띄워야 했으며, 이에 따라 군비가 증강되어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겼다. 한편 인도에 있는 총독부는 나날이 부패해 갔다. 인도 총독부에는 불필요한 인원이 넘쳐났으며 많은 관료가 하는 일 없이 재정만 축내고 있었다. 이즈음 인도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 신식 무기를 수입해 포르투갈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르투갈 해군은 무적함대라 불리며 세계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육지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요새는 언제 공격당할지 몰라 늘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물론 포르투갈 군대는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무기의 힘으로 수적으로 불리한 전투에서 승리를 끌어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곳곳에서 크고 작은 습격에 시달렸고 본국으로 수송할 물품을 보관해 둔 창고도 걸핏하면 털렸다.
157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 왕실은 막대한 군사 비용을 지출해 가면서까지 동방 무역을 지속해야 하는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끝없는 악순환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포르투갈 왕실은 동방 무역 중단을 선언했고, 왕실에서 독점하고 있던 무역 권리를 상인들에게 넘겼다. 당시 포르투갈 왕실은 함대를 조직하고 동방의 식민 정부를 유지할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인도를 향한 꿈'은 1570년에 이르러 막을 내렸다.
아프리카로 눈을 돌린 포르투갈
이러한 상황에서 성장한 어린 국왕 세바스티앙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아프리카였다. 인도에서 처참한 좌절을 겪은 포르투갈 국민 사이에서는 인도 대신 아프리카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앙골라 해안에서 모잠비크 해안에 이르는 거대한 남아프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자는 주장이었다. 여기에는 인도 식민지와 십자군 전쟁 등 원거리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포르투갈의 대문 앞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주장은 대다수 귀족과 정치인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고, 포르투갈 왕실에는 아프리카에 요새와 군비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중에는 사비를 털어서라도 아프리카 원정 비용을 책임지겠다는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여론 속에서 성인으로 성장한 세바스티앙은 '어떻게 하면 아프리카의 미개한 이교도들을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넣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쏟았다. 1568년 세바스티앙은 직접 아프리카 원정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꿈꿔온 아프리카 원정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1572년 테주강 어귀에 함대를 집결시켰으나 태풍으로 큰 피해를 보는 바람에 계획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젊은 혈기로 무장한 세바스티앙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후 비밀리에 북아프리카에 상륙해 무어인을 상대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때가 되면 전군을 이끌고 와 전쟁을 치를 것이라며 병사 일부를 남겨놓고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역사학 > 포르투갈&스페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페인, 포르투갈] 두 개의 나라, 하나의 왕국 (0) | 2024.06.04 |
---|---|
[포르투갈] 포르투갈, 스페인에 합병되다 (0) | 2024.06.03 |
[포르투갈] 포르투갈 쇠락하다: 국내 빈부격차의 악순환 (0) | 2024.06.01 |
[포르투갈] 포르투갈 쇠락하다: 향료 무역의 실체 (0) | 2024.05.31 |
[포르투갈&스페인] 아메리카와 돈키호테 저자, 세르반테스 이야기 (0) | 2024.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