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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포르투갈] 포르투갈, 스페인에 합병되다

by 티제이닷컴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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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앙의 죽음과 포르투갈 국왕 자리의 공석

 1576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터키의 지원을 받은 무어인들이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세바스티앙은 오스만 튀르크가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기독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포르투갈은 모로코 쿠데타를 구실 삼아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켰다. 
 
1578년, 스물네 살의 젊은 국왕은 직접 군대를 모으고 지휘했다. 총 17만 대군이 아프리카로 향했다. 아프리카에 상륙했을 때, 한 경험 많은 노장이 해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젊은 국왕은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세바스티앙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 알카세르키비르에서 모로코 군대와 격전을 치렀다. 결국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대패했다. 절반 이상이 죽고 나머지 절반은 모로코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세바스티앙마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 수많은 군사가 국왕의 죽음으로 목격했으나, 국왕을 지키지 못하고 함께 죽지 못한 것은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는 큰 수치였기 때문에 누구도 국왕의 죽음을 입에 올리진 않았다. 따라서 젊은 국왕 세바스티앙의 죽음은 미궁에 빠졌고, 훗날 세바스티앙 주의라는 일종의 미신을 낳았다.

 세바스티앙이 전사한 후 혼란에 빠진 포르투갈 국민들은 "세바스티앙 국왕은 죽지 않았다. 반드시 돌아와 포르투갈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굳게 믿었다. 이 미신은 이후 100년 이상 지속됐으며, 쇠락하는 포르투갈의 민중들은 구세주 세바스티앙의 귀환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다. 세바스티앙은 외아들로 태어나 형제자매가 없었고, 젊은 나이에 전사해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이제 포르투갈의 왕위는 누구에게 넘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되었다.

세바스티앙
포르투갈의 국왕, 세바스티앙


스페인의 포르투갈 점령

 주앙 3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주앙 3세와 같은 항렬에 있는 여동생 이사벨은 바로 카를 5세의 아내이며 펠리페 2세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두말할 나위 없이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로 떠올랐다. 당시 왕위 계승 서열 2위는 주앙 3세의 동생 루이스의 사생아인 클란투 수도원 원장 안토니오였다. 또 왕위 계승 서열 3위는 주앙 3세의 동생이자 섭정 추기경으로 유명한 엔리케였다. 그는 주앙 3세의 동생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왕위 계승자는 주앙 3세의 동생 두아르토 왕자의 딸 카탈리나였다.

 포르투갈의 젊은 국왕 세바스티앙이 죽자, 주앙 3세의 동생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주앙 3세의 동생이면서 세바스티앙 대신 섭정을 했던 엔리케 추기경이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엔리케 국왕은 당시 이미 64세였기 때문에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잦았다. 또한 앞으로 자식을 낳을 확률도 거의 없었다. 일단 그가 죽고 나면 그의 손자뻘 되는 계승자가 왕위를 이어 나가야 했다. 그중에는 펠리페 2세가 왕위 계승 서열 1위였고, 그다음이 안토니오와 카탈리나였다.

 왕위 계승 문제는 당시 포르투갈 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안토니오를 선택한다면 이것은 곧 포르투갈의 독립을 의미하고 펠리페 2세를 선택하면 왕권 연합이 실현된다. 포르투갈 상류층 귀족들은 대부분 스페인과의 연합을 원했다. 당시 모로코의 전쟁포로 석방으로 포르투갈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당시 펠리페 2세를 선택하는 것은 곧 유럽의 대부호를 자기들 편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스페인과의 연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이 개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포르투갈은 동방 및 브라질과 무역을 할 때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스페인의 식민지인 중앙아메리카의 은광으로 가서 한몫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공업자, 어민, 도시 근로자 등 평민들은 포르투갈의 독립을 지지했다. 평민들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에 강한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의 수상은 오래전부터 포르투갈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펠리페 2세의 수상으로 스페인 왕실에 들어오자마자 펠리페 2세에게 연합 왕권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이에 펠리페 2세도 점점 기세등등해졌고, 그는 포르투갈 내부 정세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엔리케 국왕은 자신이 죽은 후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왕위 계승자들에게 자신의 선택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왕위 계승자들의 대리인을 불러 자신의 권리를 피력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엔리케 국왕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할 수 없이 엔리케 국왕은 스페인 국왕과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엔리케 국왕은 표면적으로는 1579년 열렸던 의회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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