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233 [일본 근현대사]#9_보신전쟁, 저물어가는 막부 시대,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시작 왕정복고 정변으로 인해 조정을 차지한 도막파와 막부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제 그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대화 수단이 되었다. 이튿날 교토 서부의 니조 성에 머물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관직을 취소한다는 어지를 받았다. 보신전쟁(1868~1969) 전날 새벽부터 그의 친번 위병들도 조정에서 모두 철수당했으며,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그는 정변을 일으켜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정변 준비에 착수한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1만 군대가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은 술렁이고 장정들은 갑옷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후다이 다이묘들이 성 밖을 지키고, 성안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어지를 전하러 온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츠와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에게 어지.. 2023. 12. 24. [일본 근현대사]#8_도막파의 왕정복고(vs 쇼군의 대정봉환) 1866년 4월, 교토의 사쓰마번 관저에서는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담판을 시작했다.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의 물밑 작업에 힘입어 강력한 두 개의 번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이 담판에서 사쓰마번은 조슈번에 위기가 닥칠 경우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막부는 조슈번을 겨냥한 제2차 조슈 정벌을 일으켰다. 막부와 조슈번, 두 세력의 뒤에는 각각 프랑스와 영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2차 조슈 정벌 7월 18일, 막부가 제2차 조슈 정벌을 시작했으나, 사쓰마번은 약속을 깨고 출병을 거부했다. 다른 30개 번이 네 방향에서 조슈에 협공을 펼쳐, 조슈는 본거지인 오시마를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조슈번은 다카스기 신사쿠가 직접 .. 2023. 12. 24. [일본 근현대사]#7_존왕양이 사상과 막부의 몰락 1860년대 당시 일본 전역에서 외국인에 대한 분노가 들끓고, 외국인에게 저항하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1862년 9월 14일, 사쓰마번 번주의 후견인인 시마즈 히사미쓰는 양이에 관한 조정의 의지를 막부에 전달한 후 에도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외국과 갈등한 일련의 사건들 그런데 그의 일행 700여 명이 요코하마 부근 나마무기촌에 다다랐을 무렵, 4명의 외국인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들은 요코하마에서 수출업을 하는 영국인 리처드와 그 회사 직원 클라크, 그리고 홍콩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상인 부부였다. 히사미쓰 일행이 길을 모두 점거하고 행진하자, 이 네 명의 영국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영국인 부인이 타고 있던 말이 무언가에 놀랐는지 갑자기 히사미쓰 일행을 향해 돌진하였다. .. 2023. 12. 22. [일본 근현대사]#6_막부의 대외 개방,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한 후, 막부는 통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천황의 위엄과 숭배 정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막부는 천황과의 대립적인 분위기를 완화하고, 조정과 막부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무 합체를 실시했다. 그런데 정치 무대에 등장해 막부와의 연합을 통해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봉건 통치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웅번 다이묘들 가운데 가장 실력이 막강한 세력으로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 지역)과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 지역)이 되었다. 이 두 번의 연합을 '삿초 동맹'이라 한다. 해안이 인접해 있는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막부 말기에 막부가 무력해지는 것을 보고, 각자의 번에서 먼저 개혁을 실시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증강했다. 조슈번은 농촌의 관리 계층을 지원해 농업 생산을 장려하는 것과 동시에,.. 2023. 12. 21. 이전 1 ··· 46 47 48 49 50 51 52 ··· 5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