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238 [프랑스]#4 흑사병과 그 이후 분열되어 가는 프랑스 자크리의 난 이후 분열되는 프랑스 자크리의 난보다 더 큰 문제는 국왕이 귀족들의 포로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는 귀족들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한때 타격을 받았던 귀족들의 세력은 다시 살아났고, 서로 힘을 합침으로써 그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이로써 천신만고 끝에 하나가 되었던 프랑스는 다시 사분오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큰 위기에 봉착한 샤를 5세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세수를 정리하고 포병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군사지도자 게클랭을 프랑스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영국을 공격했다. 이때 흑세자 에드워드는 병세가 심각하여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반면, 게클랭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70년대에 영국이 프랑스에 몇 곳의 항구를 건설한 것에 자극받아 프랑스는 국가 부흥.. 2024. 12. 11. [프랑스]#4 흑사병과 자크리의 난 흑사병, 유럽을 초토화하다 1348년에 유럽 대륙에서 갑자기 고양이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원래 유럽에서 고양이는 주술과 악마를 연상시키는 동물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흑사병이 유럽 각지로 확산하는 상황에서 고양이가 흑사병을 옮기는 것으로 알려진 쥐를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흑사병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을 때 인구의 3분의 1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어떤 지역은 사망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기도 했다. 영국의 피해도 프랑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흑사병이 지나간 후에 노동력이 감소하고 병사의 수도 부족하여 영국도 전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흑사병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상인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중동으로 전해졌고, 다시 배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됐다고.. 2024. 12. 10. [프랑스]#3 백년전쟁 : 중세 기사의 몰락, 에드워드 3세의 승리 그리고 흑사병 중세 기사의 몰락 중세 시대 유럽을 종횡하던 기사는 왜 몰락하게 됐을까? 에드워드 3세의 천재적인 전쟁 능력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 엥겔스가 한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장궁은 대단히 위협적인 무기였다. 이는 영국군이 크레시, 푸아투, 아쟁쿠르 등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엥겔스가 언급한 장궁은 사정거리가 거의 360미터에 달했고, 화살이 시위를 떠날 때의 속도는 초당 60미터 이상이었다. 250미터 밖에 있는 가죽이나 천만 아니라 80미터 이내에서 정면으로 공격할 경우에는 갑옷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50미터 내에서는 뚫지 못할 것이 없었다. 에드워드 1세의 종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182년, 애버게이브니 성을 공격할 때 웨일스.. 2024. 12. 9. [프랑스]#2 백년전쟁 :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시작된 전쟁 백년전쟁 백년전쟁에서는 프랑스 모직물 공업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지역과 관련한 분쟁이 도화선이 되었다. 모직물 공업이 매우 발달한 플랑드르 지역은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받았지만, 주요 원료는 영국으로부터 들여왔다. 따라서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대해 경제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이 지역으로의 양모 수출을 금지했다. 이로써 이미 온갖 모순이 교차해 있던 양국 관계는 이미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337년 5월 24일, 필리프 6세는 영국 관할지였던 기옌을 회수할 것을 선포했고, 영국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에드워드 3세는 스스로를 프랑스 국왕으로 칭하고,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이.. 2024. 12. 8. 이전 1 2 3 4 ··· 6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