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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23_예카테리나의 영토확장과 유럽식 러시아문화

by 티제이닷컴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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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인 예카테리나 2세 주위에는 언제나 외국인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그 주변의 러시아인 모두 유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주의자였던 그녀는 표트르 대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커다란 차이와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유명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한 대신은 예카테리나 2세가 세상을 떠난 후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유럽의 판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예카테리나 2세가 여제의 자리에 있고 내가 재상으로 있었을 때는 유럽의 대포가 러시아의 동의 없이는 단 한 방도 발사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때부터 유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러시아 군대는 프랑스의 군대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고 힘도 강력했다. 17, 8세기 프랑스의 육군은 육상에서의 패자였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 말년에 이르자 러시아의 군대 역시 프랑스군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예카테리나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에는 러시아의 장군 수보로프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예카테리나의 통치 말년에는 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전체적으로 매우 커졌다. 러시아가 주변 
 변방국에서 드디어 유럽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러시아가 남쪽과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러시아의 국경이 유럽의 국경과 맞닿게 된 것 역시 러시아와 유럽이 더욱 가까워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영토 확장


 예카테리나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이스탄불을 말한다. 이곳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는데,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자신들을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 2세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스탄티노플 세 곳을 러시아의 수도로 만들고 싶어 했다. 손자 콘스탄틴을 미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히려고 준비까지 해놨다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영토 확장에 정말 진심이었다. 그녀는 남쪽 오스만 제국의 땅을 빼앗아 유럽, 더 나아가선 세계를 지배하려 했다. 비록 그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후대 러시아 통치자들의 공통적인 이상이 됐으며, 상당히 매력적인 과업으로 비치기도 했다. 20세기가 될 때까지 러시아는 줄곧 터키 지역을 점령해 그곳에 슬라브 왕조를 세우겠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늘 영토를 확장해 위대한 러시아를 만들려는 꿈을 꾸었으며, 미래의 러시아가 개화된 국가의 모습이기를 원했었다. 또한 그녀는 해악이 되는 농노제를 언젠가는 폐지하려 하기는 했다. 하지만 왕으로서 정통성이 부족하여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그녀였기에 귀족들이 반감을 살만한 일을 섣불리 실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농노제 폐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제로 폐지를 시켰다면, 아마 귀족들이 예카테리나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했을 것이다.



 러시아 문화의 완성


 러시아에서는 극장에 가서 공연을 보는 게 일반화되어 있다. 언제나 화려한 차림을 하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표정을 짓는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려 한다. 이는 러시아인들의 오랜 습관이자 전통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에는 예카테리나 2세의 영향이 있었다.

 겨울궁전에 황실 극장을 만든 여황제는 직접 분장하고 무대에 서기도 하면서 시대를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여황이 무대를 선 것은 당시 유럽을 뒤흔든 최대의 사건이었다. 유럽의 문화계 인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러시아로 달려오기도 했다. 그들이 더욱 놀란 것은 그녀가 단순히 무대 위에서 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극본을 쓸 만큼 문학을 진심으로 대하였다는 것이다.

황실 극장도 갖추고 있던 겨울궁전의 전경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는 러시아 제국의 '겨울궁전'


 예카테리나는 프랑스 소설을 번역했으며, 이라는 문학잡지에 글도 기고했다. 또한 이 잡지의 '진실과 거짓'이라는 칼럼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그녀는 많은 월급을 주고서라도 문학가를 비서로 임명했으며, 러시아 문화의 발전을 장려하기 위해서 문학가와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기까지 했다.

 예카테리나 2세가 들여온 계몽사상은 러시아인들에게 자유와 평등사상을 맛보게 해 주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는 지식인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훗날 혁명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러시아는 처음으로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시인, 소설가, 화가들도 끊임없이 탄생했다.

 비록 러시아에서 계몽사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녀와 프랑스 계몽사상가들 간의 교류는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지식에 대한 욕구를 불태우게 했다. 파리를 숭상하는 러시아인들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까지 러시아로 들여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니 러시아인들이 전보다 더욱 개방적으로 바뀌어나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러시아 문화 자체가 완전히 유럽 것을 가져다만 쓰려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세계를 정복했던 푸시킨, 체호프, 톨스토이의 시는 러시아어로 쓰였으며,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차이콥스키의 음악도 러시아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결국 선진적인 문화라 해도 스스로 소화해 내야만 비로소 자신만의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예카테리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정치와 경제에서 그랬듯 문화 역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좋은 것은 따오되, 러시아의 입맛과 현실에 맞추어 재조정하는 과정을 넣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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