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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24_예카테리나 교서와 현실적 한계_Part.1

by 티제이닷컴 2023.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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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러시아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신속하게 씨 뿌리는 일을 끝내야 했지만 막상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의 긴 겨울을 보냈다. 이러한 자연조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불굴의 인내와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기르게 된 건 아닐까? 또한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을 술로 보내며 시간을 낭비하는 버릇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러시아인들을 두고 "엄청난 핍박이 가해져야만 비로소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하는 민족"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에게 동서를 나누는 광활한 영토는 호탕한 기개를, 혹독하게 추운 날씨는 비장함을 물려주었다. 이 때문에 쓸쓸함과 비애는 러시아 예술을 대표하는 정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애는 나약한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으며 정신의 쇠퇴에 기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의 정신세계는 이처럼 우울하지만 비장하였으며, 마치 슬픈 노래와 같은 아름다움은 유럽의 각종 문학 및 예술과 결합함으로써 그 자체로 독특한 향기를 지닌 러시아 문화를 창조해 냈다.

 18세기에 개혁과 개방을 거듭한 러시아는 19세기에 문화 예술의 황금시대로 접어들었으며, 20세기 초에는 백은 시대(황금시대에 버금가는 전성기를 의미)를 맞이했다. 러시아가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유럽에서 들여온 문화와 예술이 러시아라는 국가를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다. 그렇다면 예카테리나 2세의 눈에는 유럽과 러시아가 어떤 관계로 비쳤을까?

 황제 자리에 오른 지 5년이 되던 해, 예카테리나 2세는 직접 '예카테리나의 교서'라는 법령을 작성해 포고했다. 그런데 이 문서의 처음을 장식하는 문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러시아는 유럽 국가다." 이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명확히 국가에 대한 정의를 내린 것이었다.

 이 정신을 이어 오늘날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도 같은 말을 내비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러시아는 유라시아 국가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따지자면 러시아는 의심할 바 없는 유럽 국가다. 러시아는 유럽의 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목재로 만들어진 도시였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이곳을 장중한 화강암의 도시로 탈바꿈해 놓았다. 표트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개혁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면 예카테리나는 이곳에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또 표트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럽으로 향하는 창문을 열었다면 예카테리나는 그 열려있는 창문으로 포부 있게 유럽을 향해 나아갔다.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전경. 사진 출처 : https://www.tripadvisor.co.kr


 예카테리나의 교서를 통해 러시아를 유럽 국가라고 정의한 것은 표트르의 개혁과 사상을 확인하고 이를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는 이후 200년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끈 지침이 되기도 했다. 법령의 형식을 띤 이 문서는 결국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그중 일부는 예카테리나의 통치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했으며, 그 후에 탄생하는 법률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이전 글에서 말한 것처럼 유럽의 계몽사상가들, 인문주의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곤 했었다. 예카테리나는 이들을 스승으로 대접했고, 이들 역시 러시아가 자신들의 사상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하나같이 러시아를 농노제 국가로 정의해 버렸다. 이들 눈에는 러시아가 비문명적이며 야만적인 국가로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상만 있다면, 그 사상의 도움으로 러시아는 문명을 이루어 개화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러시아가 유럽 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카테리나가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의 사상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에 예카테리나는 새로운 법 제정을 위한 법전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기구는 1649년에 통과됐던 낡은 법률을 현대화한 법률로 바꾸려 노력한 끝에 사회 상황에 그나마 부합하는 새로운 법률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위원회의 노력은 결국 수포가 되어 버렸으며, 낡은 법을 새 법으로 바꾸려 했던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제정하는 법률의 토대로 삼으라고 지시한 예카테리나의 교서가 당시 러시아 정서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여황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법 제정과 같은 실질적인 변화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카테리나의 이러한 노력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인 계층에만 전파됐다는 한계점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법전편찬위원회를 통해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국민들이 어떤 것이 불만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법률을 어떻게 수정하고 무엇을 보충해야 하는지도 말이다. 제일 중요한 개념 한 가지도 확실히 해두었는데, 바로 그녀가 러시아의 여황제며 계몽 군주라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예카테리나 교서 덕분에 유럽 사회가 그녀를 바라보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예카테리나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으며, 더 나은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 정책들은 러시아의 내부 구조를 더욱 단단히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하나의 행동과 정책들이 유럽 사회에 러시아를 알리고, 또 러시아의 입지를 높이는데 매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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