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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25_예카테리나 교서_Part.2

by 티제이닷컴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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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카테리나의 교서는 모두 22장 256조 655항으로 이루어진 풍부한 내용의 법령이다. 이 법령은 대부분 계몽사상가, 법학자,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베껴놓은 것이다. 예카테리나도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이를 인정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의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나는 몽테스키외의 작품을 베끼고 그의 이름은 언급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천국에서 나의 작품을 본다면 분명 나를 용서해 줄 거예요. 2,000만 국민의 행복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 행동을 말이에요. 몽테스키외는 너무나도 인류를 사랑해요. 그렇기 때문에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의 작품은 바로 나의 기도문입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의 교서는 단순히 외국의 사상을 베낀 것이 아니라 계몽학자들의 사상을 러시아의 실정에 맞춘 것이다. 여기서 예카테리나는 계몽 군주 사상을 드러냈으며, 심지어는 자유주의를 시작하겠노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녀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만들겠노라 다짐하며 국민이 군주를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국민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 확실히 구분 지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사상에 근거해 다음과 같이 공정하고 인도적인 사회를 수립하려 했다. "나는 오로지 신이 내게 통치하도록 하신 번영되고 부유한 나라를 희망한다. 신은 나의 증인이다. 자유는 만물의 영혼이다. 자유가 없으면 모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모든 사람이 법을 지키기를 바라지만 모두가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총체적인 목표를 원한다. 그리고 이 목표를 파괴하는 나쁜 생각과 잔인한 정치는 원하지 않는다."

 예카테리나의 교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법률을 제정한 이후 지구상에 이보다 더 공정한 법률이 출현하고 이에 따라 더욱 번영을 누리는 민족이 생겨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제정한 법률의 의미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불행을 보고 싶지 않다."

 안타깝게도 예카테리나의 이러한 교서는 바로 이 내용 때문에 러시아는커녕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프랑스에서조차도 공표되지 못했다. 결과가 예카테리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난 것이다. 노예제는 계속 시행되며 러시아에 자유의 바람은 불지 못했다.

 러시아 최초의 지식인인 라디시체프는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농민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지주가 그들에게 남겨준 것은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물건인 공기뿐이었다."

 농노들은 족쇄를 차고 마치 가축처럼 팔리고 있었다. 노예 파는 광고 옆에는 노새나 개를 파는 광고가 함께 있곤 했다. 종자 좋은 개는 수천 루블까지도 나갔지만 여자아이는 10 루블이면 살 수 있었다.

 농노제라는 문제에 대해 예카테리나 2세는 말과 행동이 달랐다. 교서에서는 1785년 이후 출생한 노예의 자녀는 자유의 몸이라 규정했지만 실제 그 내용은 실현되지 않았으며, 예카테리나 재정 초기 138명의 노예를 죽인 지주가 받은 처벌은 겨우 무기징역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뛰어난 교서 내용이 무색하게, 예카테리나 2세는 농노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1765년, 예카테리나 2세는 새로 확장한 영토와 그 영토의 농민들을 황제의 친척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들에게 나누어준다는 조령까지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초 러시아의 농노는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육박하는 2,000만 명에 이르렀다.

 1767년에 예카테리나의 교서를 완성한 여황제는 법전편찬위원회를 모아놓고 교서를 기반으로 한 절대 평등의 법률을 제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위원회가 주로 했던 일은 교서를 낭독하거나 러시아 국민을 향한 여황의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을 의논하는 실용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뿐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런 회의를 왜 함께 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했다.

 결국 위원회가 결정한 거라고는 겨우 예카테리나 2세를 '위대하고 영명한 조국의 어머니'라고 칭하자는 것밖엔 없었다. 이에 대해 예카테리나조차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법률을 심의하라고 명령했더니 한다는 게 고작 내 인격에 대한 분석이었다니."

 1768년, 튀르크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위원회의 책임자는 위원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휴회를 선포했다. 그러자 한 대표가 조약을 맺은 후 업무에 복귀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책임자는 당연할 걸 왜 묻냐 하였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예카테리나 방에서 갑자기 의자 쓰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화난 듯 서둘러 방을 떠나는 여황제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바로 무능했던 위원회에 대한 예카테리나의 대답이었다.

 계몽사상가들의 사상을 실현하고 싶던 예카테리나는 집정 당시 법정에서 언도한 체형을 유배와 같은 방법으로 대신하는 등 인도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중대한 범죄자의 형량을 반으로 줄여주거나 수감자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해 주기도 했으며, 징집도 좀 더 온화한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여황제는 러시아가 과거에서 벗어나 더 문명적이고 진보적인 국가가 되도록 여러 방면에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예카테리나가 진정한 로마노프 사람이었다면 아마 귀족의 눈치를 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못했기에 자신의 지지층들에 대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농노제를 싫어할 귀족은 없으니 그런 현실과 타협하여 농노제를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성바실리 성당의 전경입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성바실리 성당'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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