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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27_예카테리나의 러시아 영토 확장

by 티제이닷컴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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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빈손으로 러시아 땅을 밟았지만 마침내 러시아에 나의 혼수품으로 크림반도와 폴란드를 줄 수 있게 됐다." 예카테리나는 역대 러시아 차르들과 마찬가지로 영토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기에 계속해서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였다.  

 전쟁을 좋아하는 여황제의 명령을 받든 수보로프와 쿠투조프는 마침내 표트르 대제조차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냈다. 바로 오스만 튀르크의 수중에 있던 흑해의 북쪽을 모두 뺏어와 장악해 버린 것이다. 예카테리나의 정치력은 침략 전쟁에서도 그 빛을 발했다. "정치는 세 가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바로 환경, 계획, 그리고 시기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그녀는 폴란드 영토 획득에도 그 철학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1763년 10월, 폴란드의 국왕이 세상을 떠나자 예카테리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엄청난 군대와 자금을 투입해 폴란드 국회가 자신의 애인을 국왕으로 선출하도록 강요했고, (그 당시 폴란드는 선거로 왕을 선출하는 시스템이었다) 마침내 예카테리나의 애인이자 주 폴란드 러시아 대사였던 포니아토프스키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추대됐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폴란드 내정에 간섭할 수 있게 됐다.

 그 후 예카테리나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기로 했다. 1772년 8월 3일, 마침내 세 나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여 폴란드 분할 협정에 조인했으며, 이로써 러시아는 9만 2,000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폴란드의 동부를 손에 넣게 된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폴란드가 열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려 했다. 하지만 1792년 프로이센과 손을 잡은 러시아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폴란드를 침략, 나라 전체를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두 번째로 분할 협정을 맺은 러시아는 또다시 25만 평방킬로미터의 폴란드 영토를 러시아로 편입했다.

 그 후 당연히 폴란드 국민들은 끊임없이 투쟁했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역시 끊임없이 폴란드인들을 진압했다. 1795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은 다시 한번 폴란드를 나누어 가졌는데, 여기에서도 러시아는 12만 평방킬로미터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이 폴란드 3차 분할로 인해 폴란드는 유럽의 지도에서 사라졌다.

 

폴란드 분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폴란드 분할(폴란드어: Rozbiory Polski)은 18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영토가 세 차례에 걸쳐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군주

ko.wikipedia.org

 


 이에 러시아 역사학자인 클류체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예카테리나가 통치하던 시기에 러시아의 영토는 남쪽, 서쪽을 불문하고 모두 자연적인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남쪽에서 얻은 땅은 훗날 3개의 성이 됐으며, 서쪽, 폴란드로부터 빼앗은 땅은 8개의 성으로 나누어졌다. 이처럼 러시아의 50개 성 중 무려 11개가 예카테리나 통치 시기에 획득한 것이었다."

 1780년대에 예카테리나 2세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기도 했다. "북아메리카의 알래스카와 태평양의 알류샨 열도가 모두 러시아의 지도에 포함됐다" 이로써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초대형 제국으로 거듭났다.

 1767년 8월 10일, 법전편찬위원회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위대하고 영명한 황제이자 국모'라는 호칭을 내리기로 결정했고, 그녀는 대제로 불리게 됐다. 러시아 역사상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은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대제 단 두 명뿐이다.

 표트르 대제 때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유럽 세계는 경쟁적으로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 이르러서는 국제 정치 문제에서 러시아의 참여 없이는 어느 것 하나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러시아의 지위가 높아졌다. 이를 반증하듯 유럽 상인들 사이에는 러시아어로 된 상호를 짓는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의 전통과 풍속이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가 원했던 모습이 예카테리나 통치 시기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는 '예카테리나 열풍'이라고 칭했다.

 본인의 업적에 도취해 예카테리나는 1781년에 업적을 총 결산하기도 하였는데, 새로 건설된 도시, 승리한 전쟁, 국민 생활 개선에 관한 조령 등을 합친 결과 그 수가 무려 492가지에 달했다. 이런 업적을 등에 업고 예카테리나는 자신이 표트르 대제와 견줄 수 있는 인물이라 자신감을 갖게 됐다.

 1796년, 예카테리나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이와 같다. "내가 200살까지 살 수 있다면 유럽 전체를 러시아의 발밑으로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 비엔나, 파리, 콘스탄티노플, 아스트라한 여섯 개의 수도를 거느린 대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내 손자에게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을 지어주도록 하라. 그리고 그 아이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처럼 유럽을 가르는 대제국, 대러시아 제국을 세우기를 바라는 바다."

예카테리나 2세가 잠들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피터와 폴 대성당 사진입니다.
예카테리나 2세의 묘가 있는 피터와 폴 대성당. 출처 : 위키백과


 예카테리나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쓰는 놀이를 하곤 했다. 다음은 그녀 본인이 직접 쓴 자신의 묘비명이다.

 "여기에 예카테리나 2세가 묻혔노라. 1729년 5월 2일 슈체친에서 태어난 그녀는 표트르 3세와 결혼하기 위해 1744년 러시아로 왔다. 14살이 되던 해, 그녀는 자기 남편과 옐리자베타 여제, 그리고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다. 18년간의 우울하고 고독한 생활로 인해 그녀는 수많은 책을 접했다. 러시아의 황제가 된 후에는 오로지 국익만을 생각했으며 자기 국민들에게 행복과 자유, 부유함을 안겨주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쉽게 다른 사람을 용서했으며 누구를 원망하는 법도 없었다. 늘 자애로웠고 타인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쾌활했다. 그녀에게는 친구도 많았다. 그녀는 정무를 보는 데 있어 누구보다 완벽했으며 사교와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예카테리나 2세가 후대에 기억되고 싶은 이미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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