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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26_왜 예카테리나는 계몽사상을 포기하였을까

by 티제이닷컴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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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카테리나의 계몽사상을 토대로 한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노예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가장 가까이하는 신하들조차도 예카테리나 2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자신의 이상과 러시아의 현실 사이에 괴리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예카테리나 본인이 계몽사상을 실현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쨌든, 그 당시 계몽사상의 내용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이를 강행할 시 그간 쌓아온 모든 업적을 단방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제국 건설에 있어서 더 필요한 것은 어쩌면 만인의 평등이 아니라 농노제였을 것이다. 저렴한 노동력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니 말이다. 노예는 러시아 제국의 확장과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주인을 위해서는 무료로 봉사할 뿐 아니라 나라에는 각종 세금을 내기도 했다. 야심만만한 예카테리나에게 농노들은 그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굉장히 매력적인 경제자원이었다. 표트르 대제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러시아 사회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는 않았다. 자신들을 무너뜨릴 만한 개혁을 굳이 추진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예카테리나는 확실히 표트르 대제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였다. 표트르 대제처럼 예카테리나 2세 역시 러시아의 경제와 과학 기술 분야에 가장 초점을 맞추어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농노제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이는 러시아 역대 차르들이 행한 개혁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들은 문화, 경제, 교육 분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면서도 농노제, 전제 군주제 같은 정치 제도는 될 수 있는 한 보호하려 했다. 러시아의 현대화는 이렇게 정치와 문화, 경제가 점점 거리를 벌리며 진행된 것이다. 

 계몽 군주제는 러시아 안팎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러시아 전제 제도와 군주 제도를 보기 좋게 포장했으며 전제 제도 자체의 문제를 덮어버리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계몽 군주제 역시 본질적으로는 결국은 군주제였으므로 러시아의 정치적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러시아 개혁의 불완전성이 다시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이에 대해 라디시체프는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려는 군주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고 국민들에게 강조했다. 그는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는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핍박의 무게에 억눌린 노예들이 절망과 분노로 폭발하면 그들은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고관들의 머리를 자신들의 자유를 앗아간 족쇄로 짓이겨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피로 들판을 적셔 버릴 것이다. 노예 중에는 머지않아 이들을 대신할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 위대한 인물은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결코 헛된 꿈이 아니다. 나의 눈은 이미 두껍고도 신비스러운 시간의 장막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비록 이 장막이 미래를 바라보는 눈을 가리더라도 우리는 100년 뒤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라디시체프는 라는 시를 통해 마음껏 자유를 갈망했다. 그는 자유를 "신이 하사한 행복의 선물, 위대한 대업의 원천"이라 표현하면서 "노예들이 당신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소서. 당신의 열정으로 내 가슴을 불태우소서. 천둥과 같은 힘으로 어둠 속에 있는 노예들을 광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라며 노예들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 출처: 상트페테르부르크 홈페이지


 한편 이 시기에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일어났던 농민 반란인 '푸가초프의 반란'이 일어났었다.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 당시 농노제가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농민들의 소망과는 달리 단 2년 만에 푸가초프의 반란은 진압된다. 2년 만에 진압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러시아 차르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푸가초프조차도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표트르 3세를 위한 복수를 명목으로 내걸었을 정도였다.

 러시아인들은 차르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차르를 호칭할 땐 "친애하는 차르"라고 불렀다. 그러니 '예카테리나 2세를 타도하자! '가 아니라 표트르 3세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푸가초프의 반란으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계몽사상 역시 같이 소멸했다. 폐허가 된 '계몽' 위에는 채찍, 대포, 그리고 잔혹한 명령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계몽은 죽고 전제 정치가 커져갔다. 교서도 실패하고 농노제 폐지 역시 실현 불가능하며, 푸가초프의 반란까지 겪자 계몽사상에 대한 열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영토 확장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1773년, 러시아로 온 디드로는 계몽사상에 관한 작품 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미 마음 떠난 예카테리나는 디드로를 극진히 대접하기는 했지만 작품 활동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다. 디드로는 실망감을 안고 러시아를 떠나며, "국민 외에는 진정한 주인이란 있을 수 없다. 예카테리나 역시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전제 군주였다."라며 예카테리나를 비판하였다.

 집권 말기 예카테리나 2세는 이미 계몽사상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디드로의 작품을 모두 모으도록 명령했다. 이는 그의 재능이나 사상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못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편지로는 계몽사상가들을 이처럼 비난하기도 했다. "사실 당신들의 논리는 모두 어리석은 국민들의 논리가 아니오? 게다가 그 논리가 프랑스에 영광을 가져다준 것도 아니잖소?" 한편 프랑스 대혁명을 전해 들었던 그녀는 계몽사상가들을 '프랑스의 전염병', 파리를 '도적들의 소굴'로 비유하며 비난했다. 심지어는 프랑스로 대군을 보낼 계획까지 했었다.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는 그대로 쓰러져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예카테리나는 또다시 편지 한 통으로 프랑스를 비판했다. "프랑스인이라는 명칭 자체를 완전히 없애야 할 것이다. 평등, 그것은 바로 괴물이다."

 이때 예카테리나와 계몽사상은 반의어 수준이었다. 이제 러시아라는 국가에는 전제 군주제만이 남게 되었다.

 

 

 

[러시아사]#25_예카테리나 교서_Part.2

예카테리나의 교서는 모두 22장 256조 655항으로 이루어진 풍부한 내용의 법령이다. 이 법령은 대부분 계몽사상가, 법학자,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베껴놓은 것이다. 예카테리나도 달랑베르에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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