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유명한 표트르 1세(재위 1682~1725)가 즉위하기 전, 러시아는 이미 영토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였다. 하지만 그때는 다른 국가와의 교류를 차단한 폐쇄 국가였다. 시기로 따지면 서유럽 국가들은 해양을 통해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을 시기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내륙 국가였고, 그 한계를 제대로 직면하고 있었다. 주변의 바다는 북극해와 태평양의 혹한이었기에 항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늘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으러 남하정책을 실시했었다) 발트해로 바다로 나가기에는 스웨덴이, 흑해로 나가기에는 튀르크가 이를 방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나라는 걸핏하면 러시아를 침략해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기 일쑤였다.
유럽인들의 눈에 러시아는 미개하고 낙후된 국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역시 유럽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프레오브라젠스키라는 마을이 있는데, 17세기 중엽 이곳은 러시아 내의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이는 러시아가 내국인과 외국인의 접촉을 줄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러시아는 국민들이 유럽에 대해 아는 것도, 접촉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의 아버지인 알렉세이는 러시아인은 자신의 영토를 떠날 수 없는 조령까지도 발표했다. 하지만 국가 운영과 발전에는 외국인 기술자가 필요하였는데, 군대의 지휘관까지도 외국인을 고용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늘 배반하거나 적에게 투항하는, 충성심이 부족한 그들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러시아는 인재가 아쉬웠기에 그들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정규군이나 해군이라 부를 수 있는 병력이 없기 때문이다.
표트르는 궁정 내의 암투로 인해 앞서 언급한 외국인이 거주하던 프레오브라젠스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고, 그곳에서 외국인들을 통해 외부 세계를 배웠다. 표트르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결코 러시아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궁정의 근위대 가운데 50명의 젊은이를 뽑아 유럽으로 갈 것이다. 유럽의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배운 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전 세계 해양 무역을 손에 쥐어, 이미 100년 가까이 엄청난 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영국은 입헌 군주제를 수립하며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었고, 뉴턴은 과학의 시대를 열었으며, 프랑스는 루이 14세를 필두로 대륙의 강자가 되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은 이미 모든 유럽 국가가 파리를 따라 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러시아는 이런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동방정교는 서양의 과학이 러시아를 부패시킬 거라 선전하며, 러시아인들은 서양의 문물을 배척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하였다.
[역사학] - [러시아사]#4_표트르 1세 이전 러시아의 현실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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