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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40_피의 일요일 사건, 러시아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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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사건

 1905년, 러시아와 일본이 중국에서 러일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였다. 러시아 내에서는 혁명의 조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1월 22일 일요일, 새벽부터 눈보라가 휘날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15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노인과 아이들을 대동하고 나와 겨울궁전을 향해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청원서와 니콜라이 2세(재위 1895-1917)의 초상화를 들고 동방정교의 찬송가를 부르며 국민 대표제, 8시간 노동권, 의무 교육, 임금 인상, 작업 환경 개선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손에 무기 하나 쥐지 않은 그들을 기다린 것은 황제의 웃는 얼굴이 아니라 총성과 차디찬 말발굽 소리뿐이었다. 경찰과 군대는 이 평화적 행진에 발포를 시작했고, 그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는 노동자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줄곧 자비로운 아버지라 여겼던 황제에 대한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러시아는 이제 분노로 들끓었으며 이를 계기로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시작됐다.


 전 세계는 러시아의 전국적인 파업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대표자 회의)를 수립하고 혁명을 주도했으며,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와 재산을 빼앗았다. 대학생들은 교실을 박차고 나와 시위를 벌였고, 흑해 함대의 군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소수 민족은 자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귀족 출신인 자유파 비테는 "지금 러시아 전체는 현재 상황, 즉 현재의 정부와 제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혁명을 원하고 있다."라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눈앞에 펼쳐진 이런 상황에 러시아의 황제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언론과 출판, 집회의 자유를 허용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멘셰비키(소수파를 뜻하는 러시아어. 부르주아 혁명을 주장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우파를 의미)와 부르주아지들은 러시아가 입헌 군주제의 대열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며 반색을 표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황제의 눈속임에 불과했다. 차르 정부는 조용히 영국과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비스마르크'라 불렸던 스톨리핀은 '선 안정, 후 개혁'의 구호를 내걸고 러시아 전역에 걸쳐 진보 인사 탄압에 앞장섰다. 그의 교수대에서 죽은 사람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사람들은 그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편 1905년에는 한 사나이가 혁명에 관한 전단을 뿌린 혐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요새 안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가 1년 후 출옥해 불후의 명작 소설 '어머니'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가장 큰 고통'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막심 고리키'였다. 1906년에는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유배를 떠나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이 반년 동안 무려 7만 명에 달했으니 당시 러시아 어머니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1905년의 리허설이 없었다면 1917년 10월 혁명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레닌의 말처럼 1905년에 발발했던 러시아 혁명은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초, 프티로프 공장 노동자들이 동료 네 명의 해고 문제로 파업을 일으키자 신부 가폰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작성해 겨울궁전을 향해 청원 행진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1월 22일 이른 아침, 시내 각 지구의 노동자는 겨울궁전을 향해 행진했다. 황제는 마침 부재중이었으나 경찰과 군대가 이 평화적 행진에 대해 발표를 시작해, 광장을 피로 물들였다. 사망자가 500~600명에 이르고 수천 명의 부상자를 낸 이 사건은 차르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를 단숨에 무너뜨렸으며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차르 정부의 당근 정책, 토지를 개혁하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또 다른 파급 효과는 차르 정부가 최후의 자구책을 찾도록 만든 것이었다. 차르 정부는 스톨리핀을 러시아의 총리로 임명했는데, 그는 정치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달리 경제 분야에서는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의 핵심 내용은 바로 토지 소유권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는 개혁을 통해 법률상 최초로 농민의 토지 사유권을 인정했으며 토지를 유통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했다.

 러시아 정부는 대량의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었고, 이에 따라 240여만 명의 농민들은 코뮌을 벗어나 스스로 토지를 관리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도시로 진출해 시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이민을 간 농민들도 300만 명에 달했다. 당시 레닌은 이와 같은 정책이 토지 점유 제도를 유지한다는 전제하에서 펼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 될 것이라 여겼다.

피의 일요일 당시 겨울궁전 앞에서 일어난 비폭력 시위의 모습입니다
피의 일요일 당시 일어난 비폭력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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