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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42_레닌, 러시아 역사에 등장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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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탄생

 레닌이라는 이름은 시베리아의 큰 강인 레나강에서 따온 것이었다. 17세에 혁명에 가담했던 이 청년은 27세에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면서 자신의 이름을 레닌으로 바꾸었다.

 19세기의 데카브리스트 이래로 레나강은 차르 통치에 반대하고 러시아 민족의 흥성을 위한 길을 모색하다가 이곳으로 추방당한 혁명가들을 넓은 가슴으로 품어왔다.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도 혁명가들은 러시아의 노선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들은 도도하게 흐르는 이 강가에 서서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며 수없이 많은 날을 보냈다. 이 때문에 레나강은 러시아 혁명가들의 마음속에 독특한 의미로 자리 잡았다. 레나강은 조국의 번영에 대한 민족의 염원과 갈망을 상징했다.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레나강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레닌의 운명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 것은 1886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부터였다. 이듬해 3월 1일, 알렉산드르 3세를 살해하려던 대학생들이 체포됐는데 그중에는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도 있었다. 5월 8일, 레닌의 형은 결국 교수형에 처했고, 일주일 새에 레닌의 어머니는 머리가 모두 하얗게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레닌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가족을 외면했다. 레닌의 어머니는 길에서도 사람들의 따돌림을 당했으며 졸업을 앞둔 레닌의 학교에서는 사형수의 동생에게 최우수상을 줘도 되는지에 대한 열띤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레닌의 성적이 워낙 우수했기 때문에 학교 측은 그에게 상패를 안 줄 수 없었다.

 당시 레닌의 관심은 온통 러시아 노선에 쏠려 있었다. 그는 형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881년 3월 1일, 인민의 의지파들이 알렉산드르 2세를 살해하고 난 뒤 러시아인들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전혀 아니다. 알렉산드르 2세를 대신해 새로운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한 뒤에는 어땠는가? 상황이 좋아졌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바로 전혀 새로운 방법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이 되는 과정

 카잔 대학에서 레닌은 각종 사회학 이론,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했다. 바로 이때부터 그는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됐으며, 청년들이 만든 투쟁 조직에 가입하며 이름을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닌은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당시 그를 체포한 경찰은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는 왜 반란에 참여하려 하나? 자네 앞에 있는 건 높고 큰 벽이라고!" 하지만 레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건 손만 대면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마는 이미 썩어버린 벽입니다."

 1887년 12월, 레닌은 유배를 떠나게 됐다. 유배 기간 레닌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견문을 넓히고 마음을 수양했다. 1년 후 다시 카잔으로 돌아온 그는 비밀 마르크스 조직에 가입했다. 1889년, 다시 사마라로 옮겨간 그는 혼자 힘으로 대학 4년 과정의 공부를 모두 마쳤고, 1891년에는 휴학생의 신분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과에 응시했다.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장을 따낸 그는 정식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레닌은 변호사라는 직업에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차르 정부를 전복하고 인민을 해방하는 것에만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독일어와 프랑스어, 영어를 배워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을 독파했으며 사마라에서 비밀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189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온 23세의 레닌은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산주의 조직을 끌어들여 노동자 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고 조직의 공식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의 감시 대상에 들게 된 레닌은 다시 한번 체포되었다. 독방에서 그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의 초고와 수많은 소책자를 완성했다. 마땅한 필기도구가 없었던 그는 빵으로 잉크병을 만든 뒤 우유를 담아두고 몰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간수가 들어오면 그 빵을 우유와 함께 삼켜버렸다.

 1897년,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난 그는 그곳에서 중요한 저서들을 여러 권 완성했다. 그 후 레닌은 망명을 선택했고 1900년,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불꽃이라는 뜻의 '이스크라'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그의 신문은 러시아 국내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밀스럽게 유포됐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름은 점차 러시아 사람들에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얼마 후 브뤼셀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대회에 마르크스주의자를 대표해서 참가한 레닌은 다수의 표를 얻어 볼셰비키(다수파를 뜻하는 러시아어)가 됐다.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당파였지만 볼셰비키는 훗날 러시아와 세계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30년 동안 레닌은 세 번 체포되고, 두 번 유배를 당했으며, 세 번 망명길에 올랐다. 이렇듯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그는 러시아의 발전 노선을 찾는 일을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917년, 그는 직접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의 사진입니다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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