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러시아의 석탄 생산량과 면화 가공량은 1900년에 비해 각각 121퍼센트와 62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다. 수출 총액과 국민 소득 역시 각각 112퍼센트와 78.8퍼센트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1인당 식량 생산 역시 최대치를 기록했다. 1914년에 이르자 러시아는 세계 6대 무역 대국, 그리고 세계 4대 공업 대국으로 급부상했다.
1909년에 스톨리핀은 한껏 자랑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20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평화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때 러시아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모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러시아에 그와 같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미 수명이 다된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역시 스톨리핀의 출현만으로는 잿빛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1914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처음에 러시아 사람들은 이 전쟁을 게르만의 침략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에 맞서 싸우며 했던 맹세를 다시 한번 외쳤다. "나는 엄숙하게 맹세하노니, 러시아 땅 위에 단 하나의 적이라도 존재하는 한, 결코 평화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인식에 반대 입장을 보인 것은 볼셰비키와 그들의 지도자인 레닌 뿐이었다. 레닌은 이 전쟁을 시장과 식민지를 약탈하기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 비난하였고, 따라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이 전쟁을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서로 인해 레닌의 목소리는 울려 퍼지지 못했다. 러시아의 국민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군관들은 베를린에서의 승리를 대비해 예복을 갖추고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상황은 그들 생각만큼 좋진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는 엄청난 군비 부담을 떠안아야 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의 경제는 붕괴라는 절벽에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전쟁에 참여한 병사 중에는 세 명중 한 명은 총을 소지하지도 못했다. 한 장군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불쌍한 젊은이들은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 세례 속에서 쓰러진 전우의 총을 집어들 수 있을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광경인가."
군인들의 이 같은 처지는 낙후된 러시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세계 4위의 공업 대국이기는 했지만 1인당 평균 소득으로 따지면 러시아의 경제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1913년 러시아의 인구 대비 공업화 수준은 독일의 4분의 1, 영국과 비교하면 6분의 1 수준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러시아는 1915년까지 2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영토의 15퍼센트, 철도의 19퍼센트를 잃었으며, 산업 역시 30퍼센트 이상 파괴됐다. 이처럼 차르 정권은 회복 불능 수준까지 큰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는 산업 강국을 위해 현대화를 이끌어갈 경제적인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질 않았다.
니콜라이 2세 폭주하다
이런 상황임에도 니콜라이 2세는 전쟁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또다시 러시아 전역의 노동력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장정 1,500만 명을 강제로 징집했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러시아는 또다시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며 외채는 5억 루블에 달했고, 국민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만 했다. 역사는 레닌의 예견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이제 러시아인들의 한계는 극에 달했고, 러시아의 국내 상황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을 추진했다면 계급 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줄이고 쿠데타를 피하거나 늦출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개혁을 거부하고, 오히려 정치적인 반대파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중지하는 등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연속해서 두 번이나 두마를 해산시키기도 했다. 니콜라이 2세의 행동에 대해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저술가인 헨드릭 빌렘 반 룬은 이렇게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왕위에 앉아 있는 그는 목사와 여인들에 둘러싸인 허수아비 황제였다. 그는 자신의 황위를 런던과 파리의 빚쟁이들에게 저당 잡힌 채 국민과 신하들이 원하지도 않는 전쟁에 수차례나 참여했다. 그의 행동은 자신의 사형 선고장에 사인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2월 혁명, 황제를 끌어내려라
니콜라이 2세는 또다시 개혁 적기를 놓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의 황위와 생명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917년 3월(러시아 구력 2월), 식량과 연료가 극도로 부족했던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다른 이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2월 혁명의 발단이다. 이에 황제는 다시 한번 두마의 해산을 명령했지만 지도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이 이제 정권을 유지할 힘마저도 남아있질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황제의 권력 상실을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혁명이었다.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니콜라이 2세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일기에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그대로 기록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반역, 비겁함, 속임수가 온통 나를 둘러싸고 있다."
러시아를 300년 동안이나 통치해 왔던 전제 정권은 이 2월혁명으로 인해 폭동이 발생한 지 겨우 5일 만에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보다 훨씬 강력한 폭풍이 몰아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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