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제 정책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사회주의와 시장 경제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농민의 적극성을 끌어내 그들과 함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농민을 사회주의 경제와 결합할 수 있도록 상업을 발전해야만 했다. 상업 분야에 있어 신경제 정책이 가장 먼저 시행했던 것은 공산품을 농산물과 맞바꾸는 물물 교환이었다. 하지만 화폐를 통해 거래하는 방식에 익숙했던 러시아의 아낙들은 물물 교환을 하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공산품이 도달하는 시간은 항상 늦었다. 그러자 레닌은 국내의 자유 무역과 은행 시스템을 회복하고 국영 백화점을 설립할 것을 선포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늘날 러시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쇼핑 명소가 된 이 국영 백화점은 1921년 영업을 시작했다.
러시아와 미국, 무역을 시작하다
1921년 8월, 23살의 미국 청년이 크렘린 궁전을 방문하자 거리의 행인들이 모두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행객이 아니라 레닌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를 방문한 미국 상인 아먼드 해머였다. 해머의 아버지는 미국 공산당 창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을 주시하고 있던 그는 1921년 대량의 의료 설비를 가지고 러시아로 들어왔다.
레닌의 사무실에서 해머는 레닌이 들려주는 신경제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경청했다. 그중 해머를 가장 흥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공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신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과 국가에서 지원할 수 없는 일부 대기업을 합작이나 차용의 방법으로 자국 또는 외국의 자본가에게 넘겨줄 수 있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1921년 10월 28일, 러시아 최초로 외국인의 경영권을 허락하는 계약이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부에서 진행됐다. 이로써 해머는 석면 광산의 경영권을 얻게 됐고, 해머는 레닌의 지원을 받으며 1920~30년대 미국과 러시아 무역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해머는 30여 개의 미국 대기업과 연합 회사를 만들어 미국의 상품을 러시아로 들여오는 한편 러시아의 상품을 미국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과 러시아 간의 무역이 시작됐다.
하지만 러시아는 결코 단순히 외국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레닌은 이렇게 재차 강조했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미국의 자본과 기술입니다. 이것을 갖게 되면 러시아의 바퀴는 다시 한번 힘차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헨리 포드와 소비에트 연방
당시 모스크바에서 5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러시아의 세 번째 도시가 탄생했다. 고리키라 불리던 이곳에는 러시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자동차 공장인 고리키 자동차 공장이 세워졌다. 2004년에는 이곳에서 각종 모델의 자동차가 23만 대나 생산되었는데, 그중에는 가즈(GAZ)도 있었다. 가즈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가장 대표적이었던 자동차 생산업체로 꼽힌다. 러시아에서 가즈 자동차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미국 자동차 업계의 거물인 헨리 포드였다.
원래 소비에트 연방에 적대적이었던 포드는 러시아의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나사 하나도 그곳에 가져다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해머가 그런 그를 설득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러시아에서 사업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곳은 정말 어마어마한 시장이에요." 결국 러시아와 거래를 맺은 포드는 러시아와의 거래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포드는 소비에트 연방과 손을 잡고 고리키에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뒤 1932년부터 연간 10만 대의 가즈 승용차와 트럭을 생산했다.
경제가 점점 회복의 기미를 보이자 레닌은 "신경제 정책의 본질은 생산력을 최대한 높이고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국내 경제에 끌어들여 최선을 다해 혁신을 끌어내는 한편 느려터진 행정과 관료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신경제 정책은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반성이었다. 즉, 곧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가기에는 러시아의 경제 기반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너무 낙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무엇보다 신경제 정책은 당시 현실에 부합했다. 시장 시스템을 이용하는 신경제 정책은 사회주의 건설에 새로운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1922년 초, 레닌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신경제 정책이 노동자 국가의 상황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정책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방법과 형식은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승리를 축하하는 노랫소리가 아니라 짙게 깔린 먹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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