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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52_스탈린의 등장, 소련 고속 공업화의 길을 걷다

by 티제이닷컴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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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업화 노선을 취하다

 레닌의 빈자리를 스탈린이 채웠다. 스탈린이 물려받은 소련은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1920년대는 자본주의 황금시대였다. 서양의 각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유증에서 벗어났고, 주요 국가의 공업 생산량은 전쟁 전의 150퍼센트를 웃돌았다. 일부 서양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로 인해 빈곤이 사라졌으며 서양 세계는 이미 영원한 번영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당시만 해도 곧 다가올 경제 위기를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눈앞의 번영으로 자신감이 가득했던 서양 세계는 여전히 소련 경제에 대한 봉쇄 정책을 풀지 않았다. 1927년, 영국은 소련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1921년 서명한 영소 무역협정을 무효로 했다. 한편 영국의 외무장관 체임벌린은 6개국 외무장관 회의를 열고 '코민테른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1930년대에 이르자 소련에 대한 위협은 더욱 커졌다. 전쟁을 외치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1936년 마침내 반코민테른 협정을 맺었다. 1920년대에 이어 1930년대에도 소련을 향한 전쟁의 위협은 계속됐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위협 강도가 거세어지는 것과는 달리 소련 내의 경제 기반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였다. 신경제 정책으로 러시아 경제는 어느 정도 회복하기는 했지만 1928년 소련의 공업 생산액은 독일의 절반, 미국의 8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러시아 전역에 걸쳐 트랙터가 고작 2만 대뿐이라 대부분의 경작은 가축이나 사람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국민 절반 이상이 아직도 문맹이었다.

 서양의 경제 봉쇄와 전쟁의 위협 속에서 소련의 빠른 성장을 위해 스탈린이 선택한 건 '공업화'였다. 그러나 당시 소련 정권 내에서는 공업화 진행 방식에 대해 의견이 충돌했다. 어떤 이는 농업과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경제 법칙에 따라 한 걸음씩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중공업의 빠른 발전을 주장했다. 외국으로부터 중공업 기술과 설비를 빌려와 국가 공업화의 수준과 전체적인 경제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속 공업화 vs 순차적 개혁

 외부 세계의 압력이 예상만큼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부하린은 경제 법칙에 따라 차근차근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국제적인 임무를 팽개치고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지에 논쟁의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반대편에 서서 중공업의 고속 발전을 주장한 트로츠키 역시 만만치 않았다. "국제적인 임무는 팽개치려야 팽개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늘의 뜻과 국민들의 경고를 저버리는 것이라면 내가 달 밝은 밤에 발가벗고 모스크바 거리를 뛰어도 좋소. 오히려 신과 국민들은 당신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요." 트로츠키는 부하린의 주장을 "겉만 번지르르한 공업화"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처음에 공업화의 고속 발전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 스탈린은 부하린의 의견 쪽으로 더 많이 치우치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탈린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그 역시 급속한 공업화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가 태도를 바꾼 데에는 당시 흔들리고 있던 중국 영향이 컸다.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중공업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현대화를 위한 무기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요. 그리고 무기 없이는 국가의 독립도 유지할 수 없으므로 결국은 외세의 침략을 받을 수밖에 없소. 그렇게 되면 소련의 지위는 지금 중국의 처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오. 지금 중국은 자신들만의 중공업과 군수 공업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힘 있는 자들에게 마음껏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오."

이런 이유로 스탈린은 고속 공업화를 선택했다. 나날이 소련의 목을 죄어오는 국제 정세에 대항하려면 순서에 맞추어 일을 진행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속 공업화를 실현하고 공업 발전을 위한 자본을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었을까? 러시아는 18세기 영국처럼 식민지에 기대어 자본을 축적할 수도, 19세기 프랑스처럼 전쟁을 통해 공업화를 가속할 수도 없었다. 또 경제 봉쇄에 묶여 있는 상황이라 차르 정권 때처럼 외국인의 경영권을 인정함으로써 공업화를 진행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소련에 남은 방법은 국내에서 해결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소련은 절약을 통해 공업 발전의 자본을 모으기로 했다.

 소련은 계획 경제라는 수단을 이용해 자원을 최대한 통제하는 한편 농업 집단화를 실시했으며, 공산품의 가격을 높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공산품과 농산물의 협상 가격차(독점 가격과 비독점 가격과의 격차가 가위를 벌린 것처럼 증대되는 것으로, 주로 농산물과 공산품 가격 간의 격차를 일컬음)를 확대함으로써 산업화 자금을 축적했다. 그리고 중공업을 우선 발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군수 산업에도 힘썼다. 이는 농민의 이익을 보호했던 신경제 정책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방침으로, 곧 농민과 농업의 엄청난 희생을 의미했다. 시장 경제의 균형을 주장한 부하린은 이에 대해 강경한 반대의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여전히 경제 법칙에 따라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1923년부터 소련 국가계획위원회의 회의에서는 "시장이 있어야만 모든 행동이 자동으로 통제됩니다. 시장은 모든 부문과 모든 생산 단위, 그리고 모든 기업의 단독 행동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입니다."라는 의견이 언급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부하린의 의견을 탁상공론으로 치부했다. "우리가 신경제 정책을 채택한 것은 그 정책이 사회주의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이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정책은 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이제 소련에 필요한 것은 '속도'였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있어 신경제 정책은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정책이었다. 스탈린은 이렇게 강조했다. "늦어진다는 것은 낙후를 의미한다. 그리고 낙오한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매질밖에 없다." 

 고속 공업화가 대단히 매력적인 유혹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조국이 강해지길 바라는 소련인에게 있어 이는 분명 혁명 낭만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반면, 부하린은 소련의 정치무대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논쟁은 끝나고 부하린은 떠났다. 이와 함께 신경제 정책이 중단되고 강도 높은 계획 경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덕분에 소련에는 수많은 공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공장에서 사용할 원자재가 없었기에 유명무실한 공장들이었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
레닌의 뒤를 이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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