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바꾼 레닌
많은 국가에서 문화와 교육을 흡수했던 레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러시아를 심폐 소생하기 시작했다. 1918년부터 4년 동안 네 가지 정책, 즉 전시공산주의, 식량 징발제, 식량 세제, 신경제 정책을 시행했으며, 전국을 전기화하는 계획과 공업 발전 계획을 제안했다.
스탈린이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9,000개의 공장을 짓고 각종 내실 있는 경제 성과를 달성하며 수많은 지식인과 군인들을 배출해 낼 수 있었던 것도 레닌이 그 기반을 다져놓은 덕분이었다. 1941년 파시스트와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는 이미 튼튼한 산업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된 탱크 T34와 전투기 L2, 그리고 로켓 시스템 카추샤를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금속 제련 공업, 기계 공업, 무기 제조 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현대화된 과학 기술 학교도 세워졌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데, 단 15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29년만 해도 러시아에서 비행기나 트랙터,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10여 년 후인 1941년에는 러시아가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탄생
1922년 12월 30일, 모스크바 대극장에서는 힘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2,215명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외쳤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만세!"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바로 이곳에서 탄생을 알린 것이다. 그리고 그날, 52세의 레닌은 제1회 소련 인민 대표 회의 주석으로 선출됐다.
1923년 11월 20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소비에트 전체 회의에 참석한 레닌은 말했다. "사회주의는 이제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도 추상적인 환영도 아닙니다. 신경제 정책의 러시아는 곧 사회주의의 러시아로 변모할 것입니다." 이는 레닌의 마지막 연설이었다.
레닌의 죽음
레닌의 사무실 탁자 위에 놓인 일력은 1924년 1월 21일에 멈추어져 있다. 레닌은 사무실을 떠나기 전 항상 탁자 위의 일력을 한 장씩 찢었다. 하지만 그날 그에게는 더 이상 종이 한 장 찢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레닌의 옛집에서 기차역은 4베르스타(미터법이 시행되기 전 러시아의 거리 단위로, 1베르스타는 1,06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정치가들과 노동자, 농민들에 의해 집에서 기차역까지 옮겨진 레닌의 관은 곧 기차에 실려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철도의 양옆은 레닌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기차가 출발하려 해도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기차를 멈춘 기관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게 절대로 지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금 나는 1시까지 모스크바에 도착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제발 내가 그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울음을 뒤로하고 기차는 정확히 1시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레닌의 관은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였고 슬픈 노랫소리가 광장 가득 울려 퍼졌다.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던 그날, 모스크바에는 거리마다 횃불이 피워졌다. 레닌을 보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은 모닥불로 언 몸을 녹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3일이 걸려 붉은 광장에 레닌의 묘를 만든 뒤 1월 27일에는 붉은 깃발에 싸인 레닌의 관을 광장의 가장 높은 단 위에 안장했다. 장례식을 위해 의장대가 조용하고 엄숙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붉은 광장과 소련 전체가 숙연해졌다. 오후 4시, 레닌의 장례를 알리는 방송이 소련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정숙하시오. 동지 여러분! 이제 우리의 일리치를 이곳에 묻으려 합니다."
누군가는 당시 러시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모든 자동차가 서고 모든 기계가 멈추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노동자들도 모두 일을 멈추고 5분간 묵념을 올렸다. 사이렌이 울리자 공장과 열차도 일제히 정지했으며 바다에 떠 있던 선박들도 운항을 정지했다. 슬픔에 젖은 흐느낌이 마을과 도시에, 그리고 러시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이 부는 붉은 광장에는 붉은 깃발이 바람에 세차게 흔들렸으며 사람들의 눈물은 어느새 얼음이 되어버렸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들도 레닌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중국 광저우에서 국민당은 추도회를 열어 오륙십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쑨원이 추도문을 낭독하며 레닌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쑨원의 추도문
레닌의 위대함은 그가 새로운 혁명의 노선을 개척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아무런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강하고 힘 있는 볼셰비키를 만들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일생을 통틀어 보여준 실천 정신과 용기다. 폭발적인 에너지와 용기는 그의 삶에 있어 수많은 기념비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사나운 폭풍우에 쓰러지기는 했으나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이 우러르고 있다. 자본주의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제도를 만든 인물, 소련의 현대화에 든든한 초석을 마련한 인물,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을 붉은 광장으로 모이게 한 인물, 그는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역사의 한 장으로 남았다.
고리키는 레닌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톨스토이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많이 만나보았다. 하지만 레닌 앞에서 그들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존재였다. 레닌이 있어 러시아는 물론 모든 국가가 행복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바로 그가 있었기에 기적과도 같은 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몹시도 춥던 겨울 어느 날, 소련 역사의 1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17년에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자 서유럽 각 국가들은 러시아를 승인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 시장의 중요성을 인식한 나라들이 하나하나 소련과 국교를 맺기 시작했고 마침내 1924년에는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 주요 국가들은 소련을 정식 승인하여 국교를 맺었다. 이에 언론에서는 1924년을 '소련을 승인한 해'라 일컬었다. 레닌이 그토록 바라던 염원이 또 하나 이루어진 것이다.
레닌이 죽은 상황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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