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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50_소련의 신경제 정책과 미국인 '아먼드 해머'

by 티제이닷컴 2024.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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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 정책의 의의

 레닌은 신경제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산업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사유 재산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공장으로 돌아가 10~15년 안에 공장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해주시오." 하지만 자신들의 공장으로 돌아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대기업은 정부가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신경제 정책으로 무역은 활기를 되찾았다. 신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동안 개인이 운영하는 기업은 무역업의 50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공업 분야에서는 개인 기업의 비중이 고작 18퍼센트에 그쳤다.

 레닌은 자본이나 은행을 착취의 산물이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의 차용 기업은 허락했다. 미국인 기업가인 해머가 이에 적극 동참했지만, 레닌은 자본이 모두 국가의 관리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책의 문제가 '빵을 택할 것이냐, 이론을 원할 것이냐'로 귀결될 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건 결국 빵이다. 사람이란 배가 불러야 춤도 추고 노래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허기진 사람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레닌이 신경제 정책을 시행했던 것도 전쟁 이후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신경제 정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신경제 정책에 대한 찬반 논란

 1921년 8월,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에서 난데없이 총성이 울렸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상징파 시인이었던 블로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쓰여 있었다. "보라,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모스크바를. 예전의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땅은 이제 매매와 투기로 더럽혀졌다."

 블로크의 죽음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자살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콤소몰(러시아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2년 사이에 단원의 절반을 잃었으며 많은 사람이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이 모든 것은 신경제 정책을 시행한 데서 비롯됐다. 러시아인들은 신경제 정책이 상품 화폐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상품 화폐 관계는 곧 비정한 자본주의와 관련될 수밖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레닌이 자본주의로 돌아서려 한다며 비난하였고, 한 원로 공산당원은 레닌에게 직접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신경제 정책 시행은 10월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요!"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지도자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식량세를 납부하고 남은 식량과 기타 농산물의 자유 매매를 허락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조장할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에는 또다시 착취 계층이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인가! 트로츠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러시아의 경제는 매우 낙후되어 있어 계획을 통해 조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레닌은 시장이라는 마귀에게 '좀 도와주게나'라고 부탁한 겁니다."

 이러한 정서는 비단 러시아 국내만 아니라 해외에도 퍼져 있었다. 1922년 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제1차 확대회의에서 프랑스 대표는 목소리를 높여 러시아를 비난했다. 그는 신경제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부활할 것이며 이 때문에 국제 혁명에도 큰 지장이 생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강한 압력에도 레닌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들은 모두 아름다운 공산주의의 이상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모두 이 상황에서 단번에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려 하고 있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우리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레닌은 연설과 기고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하는지, 신경제 정책이 무엇인지에 관해 끊임없이 설명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라면 자신의 이야기에 분명 공감할 것이라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공산주의의 적들로 하여금 공산주의를 건설하게 합시다! 자본주의자들이 우리를 쳤던 벽돌로 공산주의를 건설하게 합시다. 프롤레타리아의 지시를 받는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낙원을 짓도록 합시다!"

 러시아에서 무려 7년 동안이나 생활했으며 지금은 백만장자가 된 해머는 1983년 중국인 친구와 소련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 시장 경제와 계획 경제를 결합한 자네 국가는 가장 좋은 선택을 내린 걸세. 60년 전 레닌이 주장한 신경제 정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 중국은 지금 레닌의 주장을 실현한 거지. 그리고 그가 옳았다는 것도 증명하고 있는 걸세."

 반발도 컸지만 레닌의 신경제 정책은 곧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식량세는 농민들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했고, 1년 후 소련의 농산물 생산량은 많이 늘어나 더 이상 굶주리는 사람도 없어졌다. 산업 분야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신경제 정책을 실시한 4년 동안 소련 경제는 회복되었으며, 1925년에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했다.

 이러한 결과에 위안을 얻은 레닌은 말했다. "전쟁이 막 끝났을 때, 러시아는 심하게 얻어맞아 반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러시아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설 수 있게 됐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마침내 세계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련과 미국의 무역항로를 이은 '아먼드 해머(1898-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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