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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57_소련, 제2차 세계대전, 스탈린그라드

by 티제이닷컴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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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11월 7일은 소련의 10월 혁명 기념일이다. 하지만 1941년 11월 7일은 예전과 달랐다. 독일군이 이미 모스크바로 진격해 오는 상황이었기에 소련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신세였다. 그날 오후, 천지는 눈으로 뒤덮였고 날씨는 평소보다 더 추웠다. 하지만 시민들은 소리 높여 군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으며 붉은 광장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밤 9시, 레닌의 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스탈린이 연설을 시작했다. "전 세계가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침략자 독일의 억압 속에서 유럽인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위대한 해방의 사명은 이제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절대 이 숭고한 사명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미하일 쿠투조프의 용기가 우리를 일어서게 할 것입니다! 위대한 레닌의 승리의 깃발이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드넓은 소련 땅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런 뒤 가장 특별한 열병식이 거행됐다. 어깨에 총을 둘러멘 10명의 군인이 붉은 광장의 레닌 묘를 지나 스탈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그들은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 어디에선가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제 우리에게 물러설 곳은 없다. 우리의 뒤에는 모스크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빋ㄴ 소련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도 매우 중요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가 전쟁에 지는 것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뉴질랜드나 다른 나라가 패할지언정 러시아만큼은 절대 독일과 전쟁에서 져서는 안 된다."

 한편 자신감에 가득 차 모스크바에서 승전식을 열 것이라고 공포했던 히틀러의 얼굴에는 금세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모스크바는 소련인들에 의해 어느새 단단한 철의 요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소련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 뒤 독일인이 모스크바에 입성한 것은 1944년 7월 17일이 되어서였다. 그날 5만 7,600명의 독일인이 줄을 지어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왔다. 전쟁 기간 중 처음으로 입성한 그 독일인들은 다름 아닌 소련군에 의해 잡힌 포로들이었다. 불패를 자랑하던 히틀러는 모스크바에서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


소련의 공업 물량 공세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여러 요건 중 하나에는 소련의 공업 기지가 있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히틀러는 그토록 많은 비행기와 탱크, 로켓이 끊이지 않고 공급되는 것에 의아해했다. 1930년대 말, 소련은 외국에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인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이룩했다. 기본적인 에너지에서부터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소련은 이미 모든 공산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우랄산맥에서부터 시베리아 일대까지는 'A급 공업 지역'으로 평가되는데, 이 지역의 건설은 소련이 새로운 공업 분포 작업을 마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졌기에 이 지역은 소련의 신공업 기지이자 전략적 후방으로 자리 잡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발발했을 무렵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세워진 스탈린그라드의 트랙터 공장에서는 10만 명의 직원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이 공장에서 생산한 것은 트랙터가 아니라 탱크였다. 1942년 8월, 이곳의 기술자들은 20일 만에 신형탱크 T34를 240대나 만들어냈다. 이들은 전투가 치열할 때는 직접 전투를 몰고 나가 독일군에 맞서기도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2년 여름부터 이듬해 2월까지 러시아 연방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전투. 독일군은 산업 중심지이자 석유 공급로인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소련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는 독일군이 패배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국면이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 밖에 로켓 '카추사'도 전쟁에서 마음껏 위력을 뽐냈다. 1941년 6월부터 대량 생산하기 시작한 이 신형 로켓에 소련인들은 카추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카추사는 사실 러시아 여성의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인 예카테리나의 애칭이다. 잔혹한 전쟁에서 적군의 병사들은 카추사를 자신이 흠모하던 여인으로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카추사는 이사코프스키와 블란터에 의해 노래로도 탄생했다. 전장의 군인들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족과 연인에 대한 사랑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배꽃이 온 땅을 뒤덮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릴 때
국경을 지키는 젊은 병사는 먼 곳에 있는 아가씨를 그리워하네
용감한 전투로 나라를 지키고 카추사의 사랑은 영원히 그의 것이네


 전쟁 동안 가사는 열 가지의 다른 버전으로 바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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