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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59_집권 후 스탈린의 적극적인 개혁

by 티제이닷컴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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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의 적극적인 개혁

 레닌과 달리 스탈린은 가까운 미래에 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1920년대에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었다.


첫째, 소련을 경제 강국으로 만들려 했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소련은 이미 풍부한 자원과 인구 같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소련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일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 비록 1등이 되진 못하더라도 3등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둘째, 단일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스탈린은 아무리 강한 연맹 공화국이라도 결국 각 민족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중앙에서 분리되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어 교육을 통해 각 민족을 융합하려 했다. 물론 모든 민족은 자신만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소련에서 각기 다른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사용하는 공화국이 형성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스탈린은 유감스럽게도 1944년 창설된 국제연합(UN)으로 인해 연맹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유는 평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연합에서는 국가마다 하나의 투표권을 갖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연합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의견이 통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소련 표 하나만으로는 소련에 불리한 의견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공화국이 되기보다는 각 국가들이 1표씩을 행사할 수 있는 게 소련에 더 이득이 되었다. 마치 영국이 자신들 소유의 캐나다,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표를 얻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해야 소련이 뉴욕에서 제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단일 국가를 세우려 했던 꿈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셋째, 당을 개혁했다.

 18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은 새로운 당규약과 강령을 제정하고 새로운 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이로써 당의 새로운 임무와 지위를 확정하려 했다. 1941년 2월에 열린 18차 전당대회에서 정치국을 대표로 보고하게 된 말렌코프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진부한 혁명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엔지니어와 교사, 의사가 필요합니다. 설령 그들이 공산당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들로 인해 조국이 지식을 갖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업은 지식이 없는 관료들이 이끌 수 있는 산업이 아닙니다. 공업화를 실현하려면 고등 교육을 받은 풍부한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레닌은 소련의 각 주와 자치공화국 당 위원회의 서기와 같은 오래된 간부들이 권력 다툼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헌법 제정 작업에 참가했다. 그 헌법은 지금도 법률 전문가들이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매우 민주적이다.

 한편, 스탈린은 소련에서 최초로 직선제를 실시했다. 이전에는 소련에서 직선제가 실시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또 차액선거제(후보자가 당선자보다 많은 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선거에는 최소한 세 명 이상의 입후보자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그의 이러한 결정은 1937년 여름 선거법으로 정식 통과됐다. 스탈린은 자신이 생각해 낸 방안이 효과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국민들에게 선거권을 주면 서너 명의 입후보자 중 한 명은 주 또는 변경 지역의 당 위원회 서기로 뽑히게 된다. 그런데 후보자들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국민들은 당연히 그 사람을 뽑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최고 소비에트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다른 일을 찾아보세요."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집권층은 자신들이 손에 쥔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흐루쇼프를 내세워 이를 거부하고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또한 차액선거에 동의하게 만들려면 먼저 반 소비에트 반혁명 조직을 없애라고 스탈린에게 요구했다. "반 소비에트 조직을 진압하면 차액선거에 따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차액선거에 동의할 수 없다."라는 것은 스탈린에 대한 최후통첩이었다.

 그렇게 전체 회의가 끝난 후 며칠 동안 집권층은 단독 행동에 들어갔다. 스탈린은 집권층이 누군가를 내세워 자신이 그동안 마르크스주의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었는지 조목조목 질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에, 레닌주의는 20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1941년 당시 소련의 국내 및 국제 정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스탈린의 행동은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러한 이론들을 계속해서 반복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당내 지도층은 그런 이유를 들어 스탈린을 맹렬히 비판하고 그의 직위를 모두 빼앗아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 잡혀가 한 시간 후에 총살당할 수도 있었다. 스탈린은 그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스탈린은 자신의 집정 동안 본인에 대한 유일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당내 지도층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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