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지구를 넘어 우주로
1911년, 치올콥스키는 당시로서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예언을 했다. "인류가 언제까지나 지구에만 머물 수는 없다. 빛과 우주를 탐험하기 위해 인류는 우선 대기층을 탐측할 것이고, 그 후에는 태양계를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그의 예견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16세기에 바다를 장악했던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이 차례로 시대의 맹주가 됐던 것처럼 20세기에는 우주를 손에 넣은 미국, 독일, 소련이 차례로 시대의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20세기 중엽부터 많은 사람들이 우주 공간의 전략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였고 미국과 소련은 이제 우주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케네디 대통령이 "우주를 장악하는 자가 지구를 장악할 것이다."라고 발표할 당시 미국은 항공 우주 분야에 있어 소련의 성과와 자신들의 초라한 성적을 비교하며 위기감을 가졌다.
1957년에는 인공위성 하나가 우주를 향해 발사됐는데, 인공위성의 몸체에는 '소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1961년 4월 12일에는 소련의 우주 비행사인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우주 진입에 성공함으로써 우주여행에 대한 인류의 꿈을 처음으로 실현했다. 이로써 '소련'이라는 이름은 다시 한번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지구까지의 높이는 인류 문명의 높이이자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서 소련의 지위를 나타낸 것이었다.
한편 인류 최초의 유인우주선 발사 성공에 힘입어 잔뜩 의기양양해진 흐루쇼프는 1961년 10월 유엔 총회장에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테이블을 두드리며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20년 안에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 것이오!"
농업 정책을 대대적으로 조정한 흐루쇼프는 농민의 부담을 줄이려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국가의 불필요한 간섭을 줄여 농민이 부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장려했다. 이로써 농업은 장기적인 침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물질 이익의 원칙'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을 실시, 자금과 노동력 투입을 늘림으로써 공업의 성장을 끌어냈다. 1953년에서 1963년까지 소련의 공업 생산 총액은 1.7배나 증가했으며 연평균 10.5퍼센트의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농업의 조방형 경작 방식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아 생산율이 매우 낮았다. 게다가 개혁 중에 나타나는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정책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는 모두 흐루쇼프의 원래 의도와는 거리가 먼 문제들이었다.
흐루쇼프의 뒤를 잇는 브레즈네프 서기장
1964년, 흐루쇼프의 뒤를 이어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호언장담을 '사회주의 발전'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었다. 그는 새로운 경제 체제를 시행하고 계획을 견지한다는 전제하에 기업의 자주권을 확대했다. 그 밖에도 각종 연합 회사를 세웠으며 집약화 경영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 발전 전략을 시행했다. 또한 미국이 베트남 전쟁으로 기진맥진해 있을 때 브레즈네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양 사회에 러시아의 존재감을 각인시켜 주었다. 한편 군사 경쟁에서도 미국과 유럽에 버금가는 성장을 거둔 러시아는 겉으로는 전략 완화 정책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서양 자본주의 세계를 향해 공격적 입장을 취했다.
당시 러시아는 건국 이래 대외적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세력 확장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보였다. 소련은 미국 다음가는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으며 군사력은 미국과 막상막하를 다투었다. 국민들의 물질생활과 문화생활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졌다.
소련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해 미국의 학자 비앨러는 이렇게 평가했다. "브레즈네프가 통치하던 때는 개혁의 성과가 가장 두드러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필적할 만한 상대가 나타나지 않을 시기'로 소련의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그때는 분명 소련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번영 뒤에 보이지 않는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브레즈네프 역시 26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국제 사회의 지평선에는 이미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다."라며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전 세계가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을 무렵 국제 사회에서는 이미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계획과 관리의 방법을 채택하고 실업률을 줄이는 한편 사회 복지와 안보에 더욱 힘쓰며 사회 갈등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이로써 경제 글로벌화의 개념이 등장했으며 각국의 경제가 공생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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