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60_스탈린 이후 집권한 흐루쇼프와 20세기 계획 경제

by 티제이닷컴 2024. 3. 10.
728x90
반응형

20세기 계획 경제

 '계획'이라는 방식이 러시아에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이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쯤 생겨난 경제사상 중 하나였다. 대공황을 겪었던 미국도 계획 경제를 실시한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 3년 정도뿐이었지만 가격 통제 기관을 두어 경제 분야에서 무정부주의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처럼 경제를 하나의 틀 속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계획'이다.

 정부는 경제의 모든 분야까지는 아니더라도 채굴이나 개발과 같은 중요한 분야는 통제하는 게 좋다. 이는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자연 자원은 국민 전체의 소유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관리해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따라서 스탈린이 이 분야의 개척자인 것은 아니다. 그저 가장 처음으로 5개년 계획을 세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금세 전 세계의 인정을 받는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열차 살인 사건'이라는 추리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러시아의 1차 5개년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이 문제에 관해 세계인의 관심이 그만큼 높았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 계획은 러시아와 러시아의 국민들을 전쟁으로부터 구하는 역할을 한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소련의 3대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

 오늘날 많은 책과 선전물에서는 흐루쇼프를 민주의 투사로 치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 중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던 사람이 바로 흐루쇼프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총살했고, 수용소로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잔인한 일을 하면서도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게 누구인지 무엇 때문인지 상관치 않은 채 총살을 자행하거나 사람들을 수용소에 감금해 버린 것이다. 그는 정치국에 총살 명령권을 요구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주변 지역은 농업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 부농이 없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3만 명의 부농을 찾아내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어 버렸다. 1938년 1월, 우크라이나 제1서기로 임명되어 키예프로 간 흐루쇼프가 그곳에서 가장 처음 모스크바로 보냈던 전보의 내용은 바로 2만 명을 총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총살하겠다고 했던 이들은 스탈린의 잔혹한 통치에 맞서 투쟁하던 사람들이었다.

 스탈린은 살아 있는 동안 차액선거를 실시할 수 없었다. 1937년 12월에 실시했던 선거는 집권층의 대규모 진압이라는 상황 속에서 진행됐으니 차액선거라 할 수 없었다. 만일 스탈린이 정말로 차액선거를 실시했다면 러시아에는 다시 한번 내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1943년 1월, 스탈린은 당을 바꾸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다. 전쟁 기간 중 유일하게 열렸던 최고 소비에트 대표대회 전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 말렌코프와 함께 당 개조를 골자로 하는 결의문 초안을 제출했다. 이 초안은 "당 기구는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 당 기관은 결정 사안의 성공 여부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모든 책임은 소비에트 정부 기구에서 진다."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었다. 즉, 당은 경제, 문화 분야에서 손을 떼고 당의 선전과 인원 선발이라는 두 가지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스탈린, 몰로토프, 말렌코프는 회의에서 소수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치국의 다른 위원들이 투표를 통해 그 결의문 초안에 반대해 버린 것이다. 스탈린 사후에 소비에트 장관회의 의장이 된 말렌코프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다시 한번 스탈린의 뜻을 실현하려 했다. 그게 1853년 여름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흐루쇼프를 위시한 당의 간부들은 비밀스럽게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말렌코프는 실각하고 흐루쇼프가 당 지도층의 대변인이 되었다.

 흐루쇼프가 일생을 통틀어 학교에 다닌 시간은 고작 4년에 불과했다. 그는 많이 배우지 못한 탓에 모르는 것도 많았다. 그랬던 그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높은 지위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당의 지도층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당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말렌코프는 1953년 총리가 됐는데, 말렌코프가 재임하기 전에는 당 간부들이 뇌물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그들은 평소 월급의 5배에서 10배가 넘는 뇌물을 받으면서도 세금을 부담하지도 당비를 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전화, 자동차, 호화 주택, 고급 병원 등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에 말렌코프는 이 모든 특권을 없애고 대신 소련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당의 지도층은 이와 같은 결정을 반가워할 리 만무했다. 그래서 흐루쇼프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흐루쇼프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말렌코프가 추진했던 모든 정책을 중단했다. 이에 따라 좀처럼 통제되지 않는 관료 집단이 정권을 장악하게 됐다. 그리고 말렌코프 이후 집권한 흐루쇼프, 안드로포프, 고르바초프는 관료 집단의 권력만을 더욱 강화할 뿐이었다.

소련의 스탈린의 차기 서기장 흐루쇼프
니키타 흐루쇼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