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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by 티제이닷컴 2024.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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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신성로마제국을 뒤흔들다

 카를 5세의 더 큰 문제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95개 조 의견서'를 붙였다. 이것은 마치 망치로 내려치듯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95개 조 의견서'는 몇 주 지나지 않아 전 독일로 퍼져 일련의 사건을 야기했다.

마르틴 루터(1483~1546)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했다. 이 결과 1517년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및 로마 교회와 관련 있는 다른 나라의 기존 질서를 파괴했고, 이에 따라 수 세기 동안 굳건한 보루 위에 통일된 가톨릭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당시 루터가 살고 있던 독일은 수십 개 제후국과 독립 영지가 모인 나라였고, 이들 제후국은 모두 유럽 최대 가톨릭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65개국 제후들은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으나 표면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곧 교황의 세속 대리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의 불만은 교황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1521년 1월 보름스에서 제국 회의가 열렸다. 교황은 이미 루터를 로마 교회에서 파문했지만카를 5세는 자신의 권력과 진보적인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해 이 문제를 제국 회의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를 5세는 일단 루터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그를 불러들였다. 1521년 4월 루터는 직접 카를 5세를 만났다. 루터는 카를 5세와 제국 제후 150여 명 앞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주장을 펼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는 한 나는 나의 입장을 견지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옳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멘"

 카를 5세는 보름스에서 루터에게 부여된 제국 시민의 모든 법적 권리를 박탈하고 제국과 가톨릭교회에서 추방했다. 루터는 독일의 작센 선제후의 성에서 숨어 지냈다. 이때부터 독일에는 종교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 개혁

 카를 5세는 제국 내 다른 문제들로 골치가 아팠지만, 종교 개혁 문제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카를 5세는 제국의 종교 통일, 즉 제국민들이 로마 가톨릭에 복종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종교 개혁은 이미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529년 독일의 6개 제후국과 14개 도시가 이미 루터교를 받아들였고, 1530년 작센과 헤센의 경계 지역에 있는 소도시 슈말칼덴에서 독일 신교 제후와 각 도시의 신교 대표가 모여 제국과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슈말칼덴동맹'을 결성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영국 국교를 세웠고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에서도 루터교를 국교로 정했다.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미 기독교 세계의 종교 대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1545년 카를 5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었으나, 기대했던 성과는 얻지 못하고 오히려 신교 제후들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1547년 엘베강 부근 밀버그에서 카를 5세의 군대와 신교 제후들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카를 5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흑마를 타고 선두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 작센 선제후는 패하고 헤센의 필리프는 포로로 붙잡히는 등 신교 세력은 완전히 와해하였다.

 하지만 종교 개혁은 카를 5세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로마 교회에 충성했던 제후국들은 더 이상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카를 5세는 인스브루크에서 자칫 적군에게 사로잡힐 뻔했으나 검은색으로 염색한 수염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제국의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1555년 그는 '아우구스부르크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독일 제후국과 자치 도시들은 루터교와 가톨릭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튀르크

 지중해 관점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주인공은 동방에서 흥성한 오스만 튀르크와 서방에서 흥성한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이 두 제국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 16세기 최고 전성기를 누린 두 왕조는 대단한 위력을 떨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카를 5세와 술레이만 대제는 이 커다란 무대 위 주인공이었다. 카를 5세가 불행했던 것은 동시대에 수많은 영웅이 공존했다는 점이다. 당시 그는 가톨릭 수호군의 우두머리로 다시 한번 십자군 깃발을 휘날려야 했다. 그러나 그의 맞수는 오스만 튀르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였다. 이 황제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방대한 대제국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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