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 로마 약탈
16세기 초까지 스페인이 바라보는 해양에 대한 시각은 분명했다. 아직 신대륙으로부터 금은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유럽 피권 쟁탈의 중심은 여전히 지중해에 있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게 부여된 시대적 의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른 뒤 그 방대한 영토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카를 5세가 가지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직함은 카를 대제 시절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 영예로움은 변함없었다. 카를 5세는 독일에서 유럽과 관련된 모든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해내야 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 구조를 보면 강력한 합스부르크 왕조가 출현해 오랫동안 유럽 대륙을 잠식하면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를 5세의 영토는 프랑스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국왕은 국내에서 강력한 왕권을 세우고 풍요로운 땅 이탈리아반도로 영토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독일 제후들은 카를 5세가 영토 확장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데 우려를 표했다. 그들은 카를 5세가 그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카를 5세가 독일 내에서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반대했다.
한편, 교황은 카를 5세의 도움으로 오스만 튀르크 세력을 물리치고 루터교와도 전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카를 5세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이러한 주변 상황으로 인해 카를 5세는 통치 기간 내내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카를 5세는 전 유럽을 적으로 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529년, 카를 5세는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봉을 들고 볼로냐에서 로마 교황과 대면했다. 이는 가톨릭 황제와 교회 수장의 의미 있는 만남이자, 한 차례 격렬한 전쟁을 치른 결과였다. 금실로 수놓은 비단 망토를 두른 황제가 스페인 말 위에서 반 바퀴 원을 그리며 땅에 내려섰다. 그의 뒤에는 기병 수천 명이 장창을 내려놓고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카를 5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교황은 그에게 키스를 보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불과 얼마 전까지 로마에서 격렬한 대항전을 치른 사이였다. 3개월 뒤 카를 5세는 교황이 가지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금 왕관과 롬바르디아의 철 왕관을 받았다. 카를 5세는 교황이 말에 오를 때 자신을 밟고 오르도록 했는데, 이는 정신적으로 교황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장면이 연출된 까닭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권력 다툼, 로마 교황의 종교적 권위와 황제 카를 5세의 권력 다툼이 결국 피의 전쟁을 불렀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프랑스의 패권 다툼은 이탈리아에서 격돌했다. 프랑스 국왕이 오래전부터 풍요로운 이탈리아 도시 국가를 노리고 있었기에 스페인과 프랑스는 밀라노를 두고 오랫동안 대치해 왔다. 물론 이탈리아의 왕이기도 했던 카를 5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부르고뉴 국경 지역, 네덜란드 남부, 스페인 등에서 반란을 선동했다. 1525년 프랑수아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야심 차게 이탈리아 진공에 나서지만 파비아에서 카를 5세에게 패하고 포로로 잡혔다.
한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카를 5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이며 가톨릭을 제국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고 있었지만, 카를 대제 이후 로마 제국은 교황의 권위를 위협해 왔다. 이러한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클레멘스 7세는 프랑수아 1세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군사 동맹을 체결하도록 도왔다.
그런데 1527년 프랑스 부르봉 공이 이끄는 독일과 스페인 용병이 로마를 침범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스페인 군대가 출병했다. 그러나 이 양쪽 군대는 교회를 약탈하고 귀족들이 모진 수모를 겪게 했다. 추기경들은 거리로 끌려 나와 사람들에게 짓밟혔다. 성체 함은 요강으로, 십자가는 과녁으로 쓰였다. 수도원은 매춘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포에 중상을 입은 프랑스 지휘관 부르봉공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르봉 공이 죽자 클레멘스 7세는 황급히 성 안젤로 성으로 도망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로마 약탈이 벌어지는 동안 카를 5세는 교황이 있는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는 6개월 후에야 스페인 군대에 교황을 석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으로 교황은 절대 카를 5세에게 대항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1529년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는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나폴리와 밀라노는 카를 5세의 손에 들어갔다. 교황은 두 가톨릭 왕이 맺은 조약을 승인하고 카를 5세에게 나폴리와 밀라노 왕관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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