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으로 대권을 거머쥔 '카를 5세'
후아나의 첫째 아들 카를 5세에게는 유전인자가 곧 유산이었다. 1500년 그가 벨기에 헨트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을 당시 도시 전체는 기쁨의 도가니였다. 그의 탄생은 훗날 그의 성대한 대관식 못지않은 축제였다. 이제 막 태어나 화려한 무늬로 수놓아진 비단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는 '룩셈부르크 공작'이란 직함을 얻었다. 수많은 기독교도, 시장, 황금 양모 기사단, 지방 영주들이 그를 추종했다.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기세는 평생토록 그를 따라다니는 상징이 되었다.
카를 5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합스부르크 왕국을 이어받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독일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였기 때문이다. 또한 카를 5세는 스페인의 가톨릭 부부 왕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스페인 영토는 물론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로렌, 프랑쉬-콩트, 오스트리아, 독일을 물려받았다. 카를 5세에 이르러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는 포메라니아 만에서 홀스타인과 그라블린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대부분을 차지했다. 나아가 스위스 각 도시와 사부아 지역을 아울러서 도나우강 강가까지 포함했다.
카를 5세는 전형적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인자를 타고 태어났다. 그는 브뤼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엄격한 플랑드르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는 외조부 페르난도가 키우면서 스페인식 교육을 받았다. 그러니까 미래의 스페인 왕은 스페인의 역사, 문화,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카를 5세;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다.
가톨릭 부부 왕으로부터 카를 황태자가 즉위하기까지 스페인은 오랫동안 시스네로스가 섭정을 했다. 시스네로스는 추기경이었으며, 스페인에 알칼라 대학을 설립했고, 학자들을 모아 여러 언어로 된 총 6권의 성경 집을 발행했다. 이것은 종교 역사상 최초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동시에 사용한 성경이다. 시스네로스는 긴 섭정 동안 나바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직업 군대를 조직해 신대륙 통치를 위한 새로운 법령을 제정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그의 업적을 치하하며 그를 '제3의 국왕'이라고 칭송했다. 1516년 카를 5세는 외조부인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를 위한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드디어 스페인 국왕 자리에 올랐다. 1년 뒤 플랑드르인이 아스트리아를 공격하자 시스네로스는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1519년, 카를 5세는 할아버지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반년 후 플랑드르의 사신이 달려와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카를 5세는 7명의 선거 후 만장일치로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황금과 플랑드르의 작은 함정을 이끌고 카를 대제의 보검과 지구의를 이어받았다. 카를 5세는 엑상프로방스의 작은 교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독일 보병 3,000명, 기병 150명, 황제 선거단과 독일 영주들에 둘러싸여 장중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로 등극했다.
플랑드르
벨기에 동플랑드르와 서플랑드르 2주를 중심으로 하는 북해 연안의 저지대를 일컫는다. 벨기에어로는 '블렌데렌', 영어로는 '플랜더스'라고 한다. 북해 연안의 저지대로 스헬데강이 동쪽 경계를 이룬다. 역사의 변천을 따라 플랑드르 지방의 경계구역도 크게 변하였는데, 한때 네덜란드 남부에서 프랑스 북동부 일대를 통틀어 지칭할 때도 있었다.
한편 카를 5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스페인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다. 카를 5세는 스페인 왕이 된 이후 나름대로 스페인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젊은 이방인 왕자가 데려온 플랑드르 관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고, 그가 스페인어를 배우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사람들은 전 국왕 페르난도가 큰 외손자보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둘째 외손자를 더 좋아했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많은 스페인 국민들은 카를 5세의 어머니 광녀 후아나가 진정한 스페인의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카를 5세는 스페인 국익은 안중에 없이 신성로마제국 건설에만 매달렸다. 스페인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톨레도 지역의 지방 영주 바테아가 카스티야의 반란군을 이끌고 성에 갇힌 후아나를 탈출시켰다. 이들은 카를 5세의 제국군과 수개월간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반란이 일어나자 카를 5세는 세금을 줄이겠다며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반란군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어느 지방 소도시에서 제국군이 승리를 쟁취했다. 제국군은 바테아를 교수형에 처했고, 카를 5세는 이 일을 계기로 스페인 통치에 대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그는 앞으로 스페인의 법률을 준수하고 플랑드르인 세력을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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