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2세(재위 1556-1598)의 제국은 카를 5세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펠리페 2세 때부터 스페인풍 정치가 이루어졌고 황제 주변 측근도 모두 스페인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국왕으로서 매우 검소하고 시간을 준수하는 등 규범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 처리에 빈틈이 없었기에 몰인정한 면모도 보였다.
국왕의 측근들은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고, 스페인의 왕들은 대대로 펠리페 2세를 높이 칭송하고 존경했다. 그는 집권한 20여 년간 언제나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정열적이고도 치밀한 성정 때문인지 그의 통치 기간 중 스페인 국력은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
펠리페 2세의 지중해
155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유스테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수도원 생활은 그리 한가롭지 않았다. 은퇴한 황제는 여전히 세계의 대소사에 관심을 기울였고, 각국의 사절들이 끊임없이 이 수도원으로 찾아와 황제를 알현했다.
카를 5세의 장례식 날, 3,000명의 기사단이 횃불을 들고 황제를 애도하는 기도문을 외우며 맨 앞에서 운구 행렬을 이끌었다. 그 뒤로는 각 교회의 수장들과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친왕들이 따랐다. 철갑을 두른 80마리 말 위에는 황제가 통치하는 각 왕국의 휘장이 달려 있었다. 검은 천을 두른 관 위에는 황제가 쓰던 왕관, 지휘봉, 패검, 지구의가 놓여 있었다.
관 옆에는 펠리페 2세가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한없이 우울하고 창백했다. 이때 펠리페 2세의 나이는 31살이었다. 그는 2년 전 카를 5세로부터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아 스페인 본토와 해외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또한 브뤼셀도 통치하고 있었다. 카를 5세가 독일에서 실권한 후 독일이라는 큰 함선의 선장 자리는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갔다.
카를 5세가 독일을 떠남과 동시에 펠리페 2세의 스페인 왕국도 독일과 이별을 고했다. 이것은 유럽 전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또한 펠리페 2세는 독일의 골치 아픈 사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559년 펠리페 2세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그의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펠리페 2세가 부친 카를 5세와 가장 다른 점은 그가 카를 5세처럼 여러 영토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스페인 안에 머물렀다. 따라서 펠리페 2세의 정령(왕명을 전달하는 사신)은 카를 5세 때처럼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등 여러 지역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직 한 곳에서 출발했다.
펠리페 2세가 계승한 제국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텅 빈 상태였다. 그는 즉위한 지 2년 만에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1557년 8월 펠리페 2세는 생캉탱에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버지 카를 5세에게 승전보를 보냈다. "밤 11시, 전방의 한 병사가 와서 프랑스군이 퇴각했고, 프랑스 장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보고했습니다." 유스테 수도원의 은자 카를 5세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흥분해 소리쳤다. "아들아! 어째서 파리로 진격하지 않은 거냐?" 그러자 펠리페 2세는 신중하게 회답했다. "파리로 진격하려면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합니다."
1557년 1월 1일, 펠리페 2세는 정식으로 스페인 왕실의 재정 파산을 선포했다. 이 선포로 인해 스페인의 대규모 정책 사업이 벽에 부딪혔다. 스페인은 파리를 향해 모든 것을 걸고 최후의 도박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펠리페 2세는 기존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체결한 후 프랑스는 국왕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일대 혼란에 빠져든다. 한편, 스페인이 재정 파산을 발표하자 대부분의 은행가가 더 이상 스페인 왕실에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중 제노바의 한 은행가가 스페인 왕실에 돈을 빌려주었지만, 그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졌다. 펠리페 2세는 한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지금 스페인은 그 어느 곳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아주 사소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직접 와서 이곳의 상황을 목격한다면 아마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나는 플랑드르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지 전혀 몰랐다."
카를 5세 시기 신성로마제국은 스페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수탈해 갔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평생 스페인에 남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반드시 스페인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놓아야 했다. 브뤼셀은 정치 수도였고 마드리드는 스페인 제국의 금융 중심지로 두 곳 모두 펠리페 2세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펠리페 2세가 스페인으로 돌아간 것은 아메리카의 황금이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펠리페 2세 앞에는 새로운 유럽 질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의 전략에 따라 영국의 메리 튜더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스페인이 영국과 연합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죽은 그해 11월 메리 튜더 역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영국과 스페인의 동맹은 깨졌다. 북해를 중심으로 영국과 플랑드르 지역을 하나로 묶으려던 스페인의 꿈도 깨졌다.
곧이어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을 포기함에 따라 펠리페 2세는 중요한 전략적 요지를 잃었다. 펠리페 2세는 독일과 영국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스페인의 주인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펠리페 2세의 제국은 스페인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카를 5세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펠리페 2세 때부터 스페인풍 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는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고, 스페인의 왕들은 펠리페 2세를 높이 칭송하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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